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몸을 매체로 삼는 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몸을 매체로 삼는 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아트리움 한가운데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빈 의자가 있다. 관객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그 의자에 앉는다. 한 사람이 앉으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의 눈을 마주한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1분이 지나기도 하고, 30분이 지나기도 한다. 그 침묵의 응시 끝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한참을 머물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2010년 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는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라는 이름으로 736시간 30분 동안 같은 의자에 앉아 1500여 명의 관객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의자 하나, 침묵 하나, 시선 하나 — 그것이 그녀가 평생을 다듬어 온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거대한 매체였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1946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출생)는 군인 출신 부모 아래서 엄격한 통제 속에 자랐다. 어머니는 박물관 관장을, 아버지는 티토 정권의 영웅이었다. 그녀의 성장기는 사랑보다 규율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그 경험은 그녀의 작업 전체에 흔적을 남겼다. 베오그라드 미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0년대 초부터 자기 몸을 매체로 삼는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칼로 자기 손바닥을 찌르고, 약을 삼켜 의식을 잃고, 차가운 얼음 위에 누워 동상의 위험을 견디는 작업들. 그녀의 초기 작업은 한 가지 질문을 향해 있었다. 한 사람의 몸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견딤의 자리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12년 동안 그녀는 독일 작가 울라이(Ulay)와 연인이자 동료로 작업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공동 작업은 만리장성의 양쪽 끝에서 출발해 90일을 걸어 한가운데서 만난 뒤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
견딤의 시간 — 〈리듬 0〉
1974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갤러리에서 아브라모비치는 6시간 동안 자기 몸을 관객에게 내맡기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작품의 제목은 〈리듬 0(Rhythm 0)〉. 그녀는 갤러리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고, 그 옆 탁자에는 72개의 사물이 놓여 있었다. 장미, 깃털, 향수, 빵, 와인, 가위, 못, 면도날, 채찍, 그리고 한 발의 총알이 든 권총. 옆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탁자 위의 사물은 무엇이든 내 몸에 사용해도 좋다. 6시간 동안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처음 한 시간 동안 관객들은 망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대담해졌다. 누군가는 그녀의 옷을 가위로 잘랐고, 누군가는 면도날로 그녀의 피부를 베었으며, 마침내 한 사람은 권총을 그녀의 손에 들려 자기 자신의 관자놀이로 향하게 했다. 다른 관객이 황급히 그 손을 떨쳐 내자 그제야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6시간이 끝나고 그녀가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관객들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한 사람의 몸이 매체가 되었을 때, 그 매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가장 잔혹한 진실이 그 6시간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만리장성 위의 이별 —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
1988년,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는 12년의 관계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작업을 만리장성 위에서 펼쳤다. 그는 황해 끝에서, 그녀는 고비사막 끝에서 출발했다. 두 사람은 매일 약 20킬로미터씩, 90일을 걸어 만리장성 한가운데서 만났다. 만남은 인사였고, 동시에 작별이었다. 두 사람은 짧게 포옹한 뒤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원래 이 작업은 두 사람의 결혼식으로 기획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행정 절차 끝에 마침내 허가가 떨어졌을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이 아니라 이별을 위해 그 거대한 길을 걸었다. 사적인 관계의 끝을 가장 거대한 풍경 위에 새겨 놓은 이 작업은,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의 이별이 어떤 무게로 한 사람의 평생에 얹히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침묵의 응시 — 〈예술가가 여기 있다〉
다시 2010년의 MoMA로 돌아가 보자. 64세의 아브라모비치는 매일 미술관이 문을 여는 시간부터 닫는 시간까지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사도,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어떤 날은 8시간, 어떤 날은 10시간 동안 한자리에 머물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모두 한 가지 경험을 공유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을 진심으로 들여다보아 주는 경험. 일상에서 우리가 거의 잃어버린 그 한 가지를 그녀는 침묵 속의 응시로 돌려주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22년 만에 다시 만난 울라이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자리의 규칙을 어기고,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눈물이 맺혔다. 그 짧은 손길은, 만리장성 위에서 끝났던 한 관계가 22년의 침묵 끝에 잠시 다시 이어졌다는 사실을 침묵 속에서 증언했다. 736시간의 응시 끝에, 그 응시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가 그 한 장면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글을 마치며
아브라모비치가 50여 년 동안 다듬어 온 매체는 단 하나, 자기 몸이다. 그녀는 그 몸을 칼날 앞에 두고, 차가운 바닥 위에 누이고, 만리장성 위에 걷게 하고, MoMA의 의자에 앉혔다. 그러나 그녀가 그 몸으로 정말로 만들고자 했던 것은 사적인 고통의 기록이 아니다. 그녀가 만들고자 한 것은,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 앞에 정직하게 마주 섰을 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다. 칼을 든 손이 멈추는 순간, 침묵의 응시 끝에 흐르는 눈물, 만리장성 한가운데의 짧은 포옹. 그 사건들은 모두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녀가 평생 미술관과 갤러리라는 공간을 빌려 만들어 온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시간의 자리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 한가운데에 그녀가 만든 그 자리는, 어쩌면 우리가 점점 잃어 가고 있는 가장 단순한 만남의 형식을 다시 가르쳐 준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본래 얼마나 거대한 사건이었는가 하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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