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와 은박지 — 이중섭, 가장 가난한 한국 화가가 사랑한 가족

 

황소와 은박지 — 이중섭, 가장 가난한 한국 화가가 사랑한 가족

들어가며

거대한 황소가 화면 가득 고개를 든다. 굵은 목, 부풀어 오른 근육, 두꺼운 검은 윤곽선. 붉은 배경 위에 폭발하듯 그려진 그 황소는 마치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기세다. 단순한 동물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 가난, 가족과의 이별을 모두 견뎌낸 한 화가의 자화상이자, 한 민족의 자화상이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호는 대향(大鄕). 박수근, 김환기와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 2세대를 대표하는 거장.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전설적인 자리에 그가 있다. 40세에 영양실조와 정신적 소진으로 사망한 화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리고 무엇보다 —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헤어진 채 평생을 그리워하다 죽은 화가.

박수근이 이름 없는 한국인의 일상을 그렸다면, 이중섭은 자신의 가족과 자기 자신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가장 사적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이다. 그가 그린 가족의 풍경 안에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모든 한국인들의 그리움이 들어있다.


평안남도의 부유한 소년

1916년 4월 10일,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이주해 자랐다. 형 이중석은 후일 원산 최초의 백화점 '백두상점'을 열어 부를 일군 사업가였다. 박수근이 가난 속에서 시작했다면, 이중섭은 부유한 집안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운명은 정반대로 흘렀다. 박수근은 평생 가난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끝까지 함께했고, 이중섭은 부유하게 출발했지만 평생을 가난과 가족과의 이별 속에서 보내다 죽었다.


오산학교 — 황소를 만나다

이중섭의 인생을 결정지은 곳은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민족 교육으로 유명했던 이 학교에서 그는 임용련(任用璉) 선생을 만난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 출신의 서양화가로, 조선 화풍을 강조하는 미술 교육을 했다. 그의 영향으로 이중섭은 한 가지 결심을 한다 — 그림에 한글로 사인하기, 그리고 소를 그리기.

당시 일제강점기에 황소는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한국인이 소에 관련된 표현을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이중섭은 보란 듯이 그 금기를 어겼다. 〈황소〉, 〈흰 소〉, 〈싸우는 소〉, 〈덤벼드는 소〉 — 그가 평생 그린 소들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개, 억눌린 자의 분노, 그리고 저항하는 의지가 한 마리의 소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소를 그리기 위해 그는 종일 소만 바라봤다. 너무 오래 보고 있어서 소도둑으로 몰려 경찰에 붙잡혀간 일화도 있다. "백정과 소도둑보다 소를 더 많이 봤다" 는 말이 그를 따라다녔다.


도쿄 유학 — 운명의 만남

1936년, 이중섭은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이듬해 더 자유로운 학풍의 도쿄 분카학원(文化學院) 으로 옮겨 졸업한다. 같은 시기 도쿄에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 한국 근대미술의 별들이 동시에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분카학원에서 그는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 —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2022). 일본 부잣집 따님이었던 그녀는 7세 후배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이중섭은 그녀에게 그림이 가득한 엽서들을 보냈다. 후일 한국 미술사에서 '엽서화' 라 불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그림 편지의 시작이었다.


1945년 — 결혼, 그리고 짧은 행복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이중섭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사코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전쟁의 끝자락, 일본인 여성이 식민지 조선으로 사랑을 따라온 것이다. 그녀는 한국 이름 '이남덕(李南德)' 으로 개명했다 —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이중섭이 직접 지어준 이름.

원산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큰아들이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모든 것을 빼앗았다.


한국전쟁, 그리고 서귀포 1.4평의 낙원

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 가족은 빈털터리로 남쪽으로 피난했다. 부산을 거쳐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들이 머문 곳이 1.4평의 좁은 단칸방 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 1.4평이 그의 평생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남았다. 11개월간의 서귀포 생활. 영양실조에 걸린 가족이 게를 잡아먹고 해초를 뜯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가족 넷이 살을 맞대고 잠들 수 있는 그 좁은 방이, 이중섭에게는 우주보다 넓은 안식처였다.

후일 그가 평생 반복해 그린 모티프 — 게, 어린아이, 물고기, 가족이 모여 누워 있는 풍경 — 들이 모두 이 시기에서 왔다. 가난했지만 함께였던 그 시간. 그것이 그의 평생의 낙원이었다.


1952년 — 가족과의 이별

1952년, 운명이 바뀌었다. 일본의 장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왔고, 폐결핵을 앓던 마사코의 건강도 심각해졌다. 두 아들도 영양실조였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중섭은 한국에 남았다.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갈 비자도, 돈도 없었다. 그는 부두에서 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증을 만들어 1953년 단 한 번 일본의 가족을 방문했다. 그러나 선원증으로는 길어야 일주일밖에 머물 수 없었다. 일주일 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그가 가족을 만난 마지막이었다.


은지화(銀紙畵) — 담뱃갑에 새긴 사랑

남은 4년 동안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릴 종이가 없었다. 캔버스도, 화구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것이 담뱃갑 속 은박지였다. 한국에서 흔하던 양담배 갑 안의 은종이 — 사람들이 버린 그것을 주워 펼치고, 못이나 철필로 표면을 눌러 형상을 새긴 후, 거기에 잉크나 물감을 발라 닦아내는 방식으로 그림을 만들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은박지 위에 우주가 펼쳐졌다.

은지화 안에 그가 그린 것은 거의 한결같다 — 가족이다. 아빠, 엄마, 두 아들이 함께 누워 있는 풍경. 함께 게를 잡는 풍경. 함께 소달구지를 타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풍경.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가족의 시간을, 그는 손바닥만 한 은박지 위에 새겨 영원히 남겼다.

후일 한국 미술사는 이 작은 작품들에 '은지화' 라는 새로운 장르 이름을 붙였다. 가난이 만든 가장 정직한 미학.


편지화 — 그리움의 기록

이중섭이 일본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도 그림이었다. 종이에 글씨를 빼곡히 쓰고, 그 여백에 그림을 가득 채웠다. 때로는 글보다 그림이 더 많았다. "나의 소중한 남덕 군", "나의 귀여운 태현아, 태성아" 로 시작하는 그 편지들에는 아빠가 곧 자전거를 사서 가겠다는 약속, 온 가족이 소달구지를 타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일화 하나 — 그는 두 아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름만 바꿔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두 장씩 썼다. 큰 아들에게도, 작은 아들에게도 빠짐없이. 그의 사랑은 그렇게 섬세하고 공평했다.

이 편지화들은 후일 한국 미술사에 엽서화·은지화와 함께 그가 창안한 새로운 미술 장르로 평가받게 된다.


〈황소〉(1953~54) — 가장 강렬한 자화상

서귀포 시절 이전부터 평생 그린 소 그림은 만년에 더 강렬해졌다. 〈황소〉(1953~54) — 35.5 × 52cm의 작은 캔버스 위에, 붉은 바탕과 대비되어 폭발하듯 고개를 든 황소 한 마리. 두꺼운 검은 윤곽선, 격렬한 붓질. 그것은 단순한 소가 아니라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가족과 떨어진 채 분노와 슬픔과 의지로 살아남으려 한 한 사내의 초상.

흥미로운 일화. 이 작품의 인쇄본을 1983년 비 오는 날 길가 액자가게에서 우연히 본 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있었다. 수중의 7천 원을 털어 그 인쇄본을 샀다. 그리고 "황소처럼 일해서 성공하면 진품을 사서 외양간(미술관)을 짓겠다" 고 다짐했다. 그가 후일 한국 미술계의 큰 후원자가 되어 서울미술관을 세우고 그 진품을 거기 걸었다는 이야기. 한 화가의 황소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1956년 — 41세의 죽음

가족과의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가난과 그리움이 그를 무너뜨렸다. 1955년 그는 거식증에 걸렸다. "나는 사기꾼이다, 가족을 데리러 간다고 하고 못 갔으니" 라는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음식을 거부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점점 정신적으로 무너져갔다. 간염, 영양실조, 거식증, 조현병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41세.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임종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절친 시인 구상(具常) 이 도착해 그의 장례를 치렀다.


사후의 명성, 그리고 미공개 진실

박수근처럼 이중섭의 진짜 명성도 사후에 시작됐다. 1960년대부터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197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국민화가가 되었다.

남은 그의 가족들 — 부인 마사코는 일본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평생을 보냈다. 101세까지 장수한 그녀는 2022년 8월 13일 별세했다. 그녀가 평생 보관해 온 이중섭의 편지화와 은지화들이 후일 공개되며,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그의 평전 〈돌아오지 않는 강 — 해협의 화가 이중섭과 그의 사랑〉(2020, 일본 쇼가쿠칸 논픽션 대상 수상작)이 출판되기도 했다.


시장이 말하는 이중섭

  • 2010년 〈황소〉 35억 6천만 원에 낙찰
  • 2018년 또 다른 〈황소〉, 47억 원에 낙찰
  • 2021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사후 기증한 진품 12점(유화 6점, 수채화 1점, 은지화 2점, 엽서화 3점)이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됨
  • 〈황소〉 한 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한국에서 만나는 이중섭

  • 이중섭미술관 (제주 서귀포) — 그가 가족과 함께 살았던 1.4평 옛집이 복원되어 있다. 2025년 6월에 약 10배 규모로 새 미술관이 재개관 예정. 350억 원 투입.
  • 국립현대미술관 — 〈부부〉 등 주요 작품 소장
  • 삼성미술관 리움 — 〈황소〉, 〈가족〉 등 소장
  • 홍익대학교 박물관 — 〈흰 소〉(1954)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 이건희 회장 기증 〈황소〉

마치며 — 그가 그린 낙원

이번 시리즈에서 만난 김환기가 그리운 사람들의 점을, 박수근이 이름 없는 한국인들을 그렸다면, 이중섭은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가 평생 그린 황소는 분노였고, 게는 서귀포의 행복이었고, 가족은 잃어버린 낙원이었다. 그가 가난해서 캔버스 대신 은박지에 그린 그림들은, 역설적으로 한국 미술사의 가장 정직하고 가장 사무친 기록이 되었다.

다음에 그의 황소나 은지화 앞에 설 일이 있다면, 잠깐 멈춰 생각해보시길. 손바닥만 한 그 작은 은박지에 새겨진 가족의 모습 — 그것을 그린 사람은 끝내 그 가족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41세에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새긴 그 가족은 그림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다. 그것이 이중섭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슬픈 선물이다.


"나의 소중한 남덕 군,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 그날을 위해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 이중섭이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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