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의 춤 —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미술이 된 순간
캔버스 위의 춤 — 잭슨 폴록,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미술이 된 순간
들어가며
거대한 캔버스가 바닥에 깔려 있다. 한 사내가 그 위를 걸어 다니고 있다. 손에는 붓이 아니라 막대기. 거기 묻은 페인트를 그는 공중에 뿌린다. 떨어진다. 흩어진다. 캔버스 위에 길게 이어지는 검은 선, 흰 선, 갈색 선. 그가 다시 다른 색을 묻혀 다른 방향에서 뿌린다. 또 떨어진다. 또 흐른다. 사내는 캔버스의 사방에서 걸어 들어가 그 위에서 춤을 춘다.
이것이 1947년 어느 날, 미국 롱아일랜드 스프링스의 한 헛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미술의 역사가 바뀌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가장 폭발적이고 가장 신화화된 이름.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 의 발명자,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의 대명사. 그리고 무엇보다 — 유럽이 수백 년간 지배한 미술의 중심을 미국 뉴욕으로 옮겨놓은 사람.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 1960년대 팝아트로 폭발하기 10년 전, 이미 폴록이 길을 열어놓았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미국 작가들 — 워홀, 바스키아, 켈리, 톰블리, 리히텐슈타인 — 은 모두 폴록의 그림자 아래에서 시작했다. 그들이 폴록의 이후를 그렸다면, 폴록은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있다.
와이오밍의 농가 소년
1912년 1월 28일, 잭슨 폴록은 미국 와이오밍주 코디의 농가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후 어머니가 다섯 아들을 키웠다. 가족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 서부를 떠돌았다. 거친 자연, 가난, 그리고 부친의 부재. 폴록의 평생 따라다닌 불안한 마초성과 알코올 의존증의 출발점이 거기 있었다.
LA의 매뉴얼 아츠 고등학교에서 그는 퇴학을 반복했다. 그러나 1930년, 18세에 형을 따라 뉴욕에 정착하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된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 에서 그는 지방주의 화가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 의 지도를 받았다.
영향들 — 멕시코, 인디언, 융
폴록의 미술은 어느 한 곳에서 오지 않았다. 여러 갈래의 영향이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
멕시코 벽화가들 —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936년 폴록은 뉴욕에서 시케이로스의 실험 공방에 참여하면서 액체 페인트를 캔버스에 붓는 기법을 처음 알게 됐다. 이것이 11년 후 드립 페인팅으로 이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 예술 — 어린 시절 미 서부에서 본 인디언들의 모래 그림(sand painting). 인디언 주술사들이 땅바닥에 색 모래를 흩뿌려 그림을 그리는 의식.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작업하는 폴록의 결정적 발상이 거기서 왔다.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 — 1939년 폴록은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융 분석가를 방문했다. 그 분석가가 그에게 권유한 것이 그림 그리기. 무의식의 직접적 표출로서의 회화. 이때부터 폴록은 자신의 그림을 마음의 발로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연, 즉흥, 무의식 — 이것들이 그의 작업의 핵심 어휘가 된다.
1943년 페기 구겐하임 — 결정적 후원자
폴록의 인생을 바꾼 사람이 있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 컬렉터이자 화랑주. 1943년 그녀가 운영하던 뉴욕의 〈금세기의 미술(Art of This Century)〉 갤러리에서 폴록은 첫 개인전을 열었다. 페기는 그에게 월급제로 후원을 시작했다 — 폴록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매달 일정 금액을 지원하는 방식. 미술사에서 한 후원자가 한 화가를 발굴하고 키워낸 가장 결정적 사례 중 하나다.
페기는 1947년 폴록을 위해 거대한 벽화 〈Mural〉을 의뢰했다. 그녀의 자택 입구를 위한 벽화. 폴록은 이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몇 달간 손도 못 대다가, 어느 날 밤 단 하룻밤에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이 일화는 후일 다소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벽화 작업이 그를 거대한 스케일과 즉흥적 작업의 자리로 데려갔다.
1945년 결혼, 그리고 스프링스로의 이주
같은 해 1945년, 폴록은 동료 화가 리 크라스너(Lee Krasner, 1908~1984) 와 결혼한다. 크라스너는 자신도 뛰어난 추상표현주의 화가였지만, 폴록을 위해 자신의 작가 활동을 한동안 접고 그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그녀의 조력 없이는 폴록의 성공은 불가능했다.
결혼 직후 두 사람은 뉴욕 시내를 떠나 롱아일랜드 동쪽 스프링스(Springs) 의 시골 농가로 이주한다.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했다. 거기서, 1947년에, 모든 것이 시작됐다.
1947년 — 드립 페인팅의 발명
스프링스의 헛간 작업실에서 폴록은 결정적 도약을 한다. 이젤(easel)을 버리고,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작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붓 대신 막대기, 굳은 붓, 주사기, 깡통을 들고 거기 묻힌 페인트를 캔버스 위에 떨어뜨리고, 흘리고, 뿌렸다.
페인트는 미술용이 아니었다 — 공업용 에나멜 페인트, 가정용 페인트. 가격이 저렴하고 점성이 적당해 잘 흐르는 것들. 모래나 유리가루를 함께 뿌리기도 했다. 미술사 수백 년의 고결한 재료 관념이 거기서 무너졌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 그가 캔버스의 사방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에서, 좌우에서. 캔버스에 위와 아래가 없었다. 작품은 그래서 올-오버(all-over) 구도로 완성됐다. 어느 한 점이 중심이 아니라, 전체가 동등하게 채워진 화면.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가 견지해 온 원근법의 중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폴록 본인이 한 말이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오직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액션 페인팅 — 그림이 아니라 행위
이 새로운 미술에 두 비평가가 결정적인 이름을 붙였다.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는 1952년 평론에서 폴록의 작업을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이라고 명명했다. "캔버스는 그림이 그려지는 표면이 아니라, 작가가 행동하는 경기장(arena)이다." 완성된 그림보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선언.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는 폴록을 모더니즘 회화의 정점으로 옹호했다. 그린버그가 좋아한 회화의 두 조건 — 평면성(flatness)과 비재현성(non-representation).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그 둘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그린버그가 폴록을 처음 봤을 때 한 평이 전설로 남아 있다 — "폴록의 재능은 화산 같다. 불이 있다. 예측할 수 없고, 규율도 없다. 광물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온다."
1949년 — 〈LIFE〉 잡지 표지
1949년 8월 8일, 미국 최대 라이프스타일 잡지 〈LIFE〉 가 폴록을 표지로 다뤘다. 제목은 충격적이었다 — "Jackson Pollock: Is He the Greatest Living Painter in the United States?" (잭슨 폴록: 그가 미국 최고의 살아 있는 화가인가?)
미술 잡지가 아닌 대중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한 화가가 표지를 장식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순간 폴록은 미국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화가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이 유럽 미술의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의 거장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 — 폴록의 부상은 냉전기 미국의 문화 전략과도 맞물렸다. 광대한 스케일, 개척정신, 자유, 개인주의 — 폴록의 그림은 그 모든 미국적 가치를 시각화했다. CIA가 추상표현주의를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비밀리에 후원했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졌다.
대표작들
- 〈Number 1A, 1948〉 — 1948년. MoMA 소장. 폴록의 가장 상징적인 드립 페인팅 중 하나
- 〈Number 1, 1949〉 — 1949년. MoMA 소장
- 〈Autumn Rhythm (Number 30)〉(1950) — 가을의 리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266.7 × 525.8cm의 거대한 작품. 갈색·검정·흰색 드리핑이 가을 숲의 리듬을 만든다.
- 〈Lavender Mist (Number 1, 1950)〉 —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소장. 분홍·흰색·은색의 부드러운 안개 같은 화면.
- 〈Number 11, 1952〉 (별명 〈Blue Poles〉) — 1973년 호주 국립미술관이 200만 달러에 매입(당시 근대 회화 최고가). 푸른 기둥들이 화면을 가른다.
- 〈Number 5, 1948〉 — 2006년 사적 거래 1억 4천만 달러(폴록 작품 최고가)
후기 — 매너리즘과 회귀
1950년대 초중반, 폴록은 자신의 드립 페인팅에 허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구상과 표현주의로 돌아가려 했다. 검정만으로 그린 〈Black Pourings〉 시리즈, 그리고 다시 인물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들. 그러나 평론가들은 이를 후퇴로 보았다. 폴록 자신도 이 시기 깊은 매너리즘과 자기 의심에 시달렸다.
알코올 의존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부인 리 크라스너와의 관계도 악화됐다. 그는 젊은 정부 루스 클라이그먼(Ruth Kligman) 과 사귀기 시작했다. 1956년 여름, 리는 그를 떠나 유럽 여행을 떠났다.
1956년 8월 11일 — 음주운전 사고
1956년 8월 11일 밤, 폴록은 음주 상태로 자신의 차를 운전했다. 동승자는 정부 루스 클라이그먼과 그녀의 친구 에디스 메츠거(Edith Metzger). 스프링스의 시골길에서 폴록은 차를 통제하지 못하고 나무에 충돌했다. 폴록과 메츠거는 즉사했고, 클라이그먼만 살아남았다. 폴록은 44세였다.
리 크라스너는 유럽에서 급히 돌아와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평생 폴록의 유산을 지키는 일에 헌신했다. 자신의 작가 활동은 폴록 사후에야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한 사실 하나 — 폴록이 죽기 직전 마지막 두 해 동안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
사후의 신화
폴록의 죽음은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짧은 생, 극단적인 작업, 비극적 죽음 — 그는 미술계의 제임스 딘이 되었다. 그가 만든 기법 —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즉흥적으로 페인트를 뿌리는 작업 — 은 후일 모든 추상표현주의의 표준이 되었다. 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윌렘 더 쿠닝, 클리퍼드 스틸 같은 거장들이 자신의 길을 만들어갔다.
영화 〈Pollock〉(2000)에서 에드 해리스(Ed Harris)가 그를 연기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2009년 1월 28일, 폴록의 기일에 맞춰 구글이 두들(Google Doodle)을 폴록 스타일의 그림으로 바꾸기도 했다.
한국에서 만나는 폴록
- 국립현대미술관 — 폴록의 직접 작품은 없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한국 추상표현주의(이응노, 김환기 등)의 작품들과 함께 폴록의 영상자료가 자주 전시된다
- 2025년 노원문화재단 〈뉴욕의 거장들: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친구들〉 등 기획전에서 그의 주요 작품 인쇄본·드로잉 등이 소개됨
- 그의 진품을 직접 보려면 MoMA(뉴욕), 메트로폴리탄(뉴욕), 워싱턴 국립미술관, 호주 국립미술관 등을 방문해야 한다.
마치며 — 캔버스 위의 춤
폴록이 1956년에 죽었을 때 그가 남긴 것은 단지 그림 몇 백 점이 아니었다. 미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다. 르네상스 이후 600년간 회화는 세계를 캔버스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폴록은 그것을 끝냈다. 그가 시작한 것은 — 회화가 그 자체로 행위가 되는 미술이었다. 캔버스는 더 이상 세계가 비치는 창이 아니라, 작가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만난 워홀이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고, 켈리가 형태를 줄이고 또 줄였다면, 폴록은 정반대로 갔다. 자기 몸 자체가 캔버스에 새겨지는 것. 그가 캔버스 위에서 추던 춤이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한국 작가들 중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은 — 같은 시리즈에서 만난 이건용의 신체 회화(Bodyscape). 두 사람 모두 그림이 그려지는 행위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사람이다.
다음에 폴록의 드리핑 앞에 설 일이 있다면, 그 어지러워 보이는 선들을 천천히 따라가보시길. 거기 한 사내가 캔버스 위에서 추던 춤의 경로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 경로가 1947년 어느 날,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오직 나중에야 알게 된다."
— Jackson Pol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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