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우는 곳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화가
색이 우는 곳 —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화가
들어가며
거대한 캔버스. 그 위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두세 개의 흐릿한 직사각형 색면. 빨강 위에 검정. 또는 주황과 노랑. 또는 보라와 회색. 윤곽은 흐릿하다. 색과 색의 경계가 안개처럼 번진다. 사람이 그렸다기보다 색 자체가 호흡하는 것 같다.
당신이 미술관 그 그림 앞에 처음 섰을 때,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게 미술인가? 그저 색 두 칸일 뿐인데?" 그러나 잠깐 거기 머물러 보면,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 정말로 — 눈물을 흘린다. 아무 이유 없이. 자기도 영문 모른 채. 미술사에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는 그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본명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Marcus Rothkowitz).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색면 추상(Color Field Painting)의 정점. 폴록이 동(動)적인 화가였다면, 로스코는 정(靜)적인 화가였다. 폴록이 캔버스 위에서 춤을 추며 격렬하게 페인트를 뿌렸다면, 로스코는 거대한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올라 장시간 천천히 색을 칠하는 사색의 화가였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 같은 뉴욕에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두 정점을 차지했고, 그리고 둘 다 비극적으로 죽었다. 폴록은 1956년 음주운전 사고로, 로스코는 1970년 자살로.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 유럽이 600년간 가졌던 미술의 중심을 미국 뉴욕으로 옮겨온 결정적 사건이었다.
라트비아의 유대인 소년
1903년 9월 25일, 로스코는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라트비아 드빈스크(Dvinsk, 현재의 다우가프필스) 의 유대인 가정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1913년, 10세의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한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유대인 박해(포그롬) 와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떠난 길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그는 외부인이었다. 영어가 서툰 어린 이민자. 유대인. 동유럽 출신. 그가 평생 작품에서 표현한 깊은 비애감과 영적 갈망의 출발점이 거기 있었다.
예일대 — 장학금이 박탈된 사건
명석한 학생이었던 로스코는 1921년 18세에 예일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심리학과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1923년, 그의 장학금이 예고 없이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예일대를 비롯한 미국 명문대들은 유대인 학생을 제한하는 비공식 쿼터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차별의 직접적 피해자가 된 것이다.
분노한 로스코는 예일대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가 평생 미국의 엘리트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해 가진 깊은 반감이 이때 형성됐다. 흥미로운 사실 —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1969년, 예일대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너무 늦은 인정이었다.
뉴욕 — 1923년부터의 작품 활동
1923년, 20세의 로스코는 뉴욕에 정착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 에서 막스 웨버(Max Weber) 의 지도를 받았다. 같은 러시아 출신이자 마티스 밑에서 배운 적이 있는 막스 웨버의 영향으로 그는 표현주의에서 출발했다.
1928년 첫 전시회를 열었지만 즉각적인 성공은 없었다. 1930년대 그는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 라는 색면화의 선배 화가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는다. 마티스의 추종자였던 에이버리에게서 대담한 색채 사용과 평면적 색면 구성을 배웠다. 후일 로스코의 평생 작업의 씨앗이 거기 있었다.
이 시기 로스코의 그림은 — 1936~1940년에 그가 자주 그린 뉴욕 지하철 풍경으로 대표된다. 외로운 인물들이 어두운 지하철역에 서 있는 풍경. 도시 속의 고립과 침묵. 후일 그의 색면화에 등장할 고독의 정서가 이미 거기 있었다.
1935년 'Ten' — 추상으로의 전환
1935년, 32세의 로스코는 '더 텐(The Ten)' 이라는 미술가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된다. 아돌프 고틀리브, 일리야 볼로토프스키 등 9명의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모인 단체. 1940년 해체될 때까지 로스코는 이 그룹과만 전시했다.
1938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유럽에서 나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940년에는 이름을 마르쿠스 로스코비츠에서 마크 로스코로 정식 개명한다 — 유대인 이름의 흔적을 줄이려는 결정이었다.
네 시기 — 리얼리즘에서 색면까지
미술사가들은 로스코의 45년 작품 활동을 네 시기로 나눈다.
- 리얼리즘 시기 (1924~1940) — 풍경, 초상, 정물, 뉴욕 지하철 풍경
- 초현실주의 시기 (1940~1946) —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 모티프. 호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의 영향. 〈근원〉, 〈물속 드라마〉 같은 작품
- 과도기 (1946~1949) — 〈멀티폼(Multiform)〉. 안개처럼 모호한 색면이 점차 사각형 색면으로 발전
- 고전주의 시기 (1949~1970) — 그가 평생 알려진 직사각형 색면 추상. 21년의 시간
이 네 시기를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다 —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을 시각화하려는 추구.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 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한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비극, 황홀경, 운명 — 그것이 내가 관심 있는 전부다."
1948년 —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색면의 탄생
로스코의 인생을 바꾼 한 사건이 있었다. 1948년 그의 어머니 안나 골딘이 사망한 것. 깊은 우울증에 빠진 로스코는 그 슬픔 속에서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다. 1949년부터 그가 남은 21년간 끊임없이 변주할 그 양식 — 거대한 캔버스에 흐릿한 직사각형 색면을 수직으로 배열한 회화.
흥미로운 사실 하나 — 1949년 로스코는 MoMA가 새로 구입한 마티스의 〈빨간색 작업실(The Red Studio)〉(1911) 앞에 자주 머물렀다. 거의 화면 전체가 빨강으로 뒤덮인 그 그림. 로스코는 매혹됐다. 1954년 그는 이례적으로 제목을 단 작품 〈마티스에게 오마쥬(Homage to Matisse)〉를 제작했다. 그의 거의 유일한 제목 있는 색면화. 색채가 화면을 지배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그의 평생 화두가 거기 있었다.
색면 추상의 양식
1950년경 완성된 로스코의 양식은 일관되게 단순하다.
- 거대한 캔버스 — 종종 2m × 3m 이상. 관람객을 압도하는 크기
- 두~네 개의 직사각형 색면 — 큰 색면 배경 위에 수직으로 배열
- 흐릿한 경계 — 색과 색의 경계가 안개처럼 번진다. 칼로 자른 듯한 켈리의 하드 에지와 정반대
- 층층이 쌓인 물감 — 캔버스에 얇게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방식. 한 번에 칠한 게 아니라 여러 겹의 층이 쌓여 깊이를 만든다
- 제목 없음 — 대부분 〈Untitled〉. 또는 사용된 색의 이름. 그가 의도적으로 해석을 차단한 결정
가장 중요한 사실. 그의 캔버스 앞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 단순해 보이는 색면이 사실은 수십 겹의 색이 미묘하게 겹쳐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빨강 위에 빨강. 주황 위에 주황. 그 깊이가 그의 색을 살아 있게 만든다.
대표작들
- 〈No. 5/No. 22〉(1950) — MoMA 소장
- 〈Orange and Yellow〉(1956)
- 〈Black on Maroon〉(1958) — 1958년경부터 그의 색이 어두워지기 시작
- 〈Orange, Red, Yellow〉(1961) — 2012년 크리스티 경매 8,690만 달러. 로스코 작품 최고가 기록 중 하나
- 〈White Center (Yellow, Pink and Lavender on Rose)〉(1950) — 2007년 7,280만 달러
- 〈No. 6 (Violet, Green and Red)〉(1951) — 2014년 1억 8,600만 달러 사적 거래
시그램 빌딩 사건 — 1958년의 거절
1958년, 뉴욕 시그램 빌딩의 포 시즌스(Four Seasons) 레스토랑이 로스코에게 거대한 벽화 시리즈를 의뢰했다. 당시 미술사 최대 규모의 의뢰. 로스코는 어두운 색조의 거대한 벽화 30여 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 도중 그는 직접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 "이런 사치스럽고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사 배경으로 내 그림을 보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 1959년, 그는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었다.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적 자존심의 사례 중 하나.
당시 그가 그렸던 〈Seagram Murals〉 시리즈는 후일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에 기증되어 영구 전시되고 있다. 그 어두운 빨강과 검정의 그림들이 부유한 레스토랑이 아닌 미술관에서 영원히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 — 로스코의 작은 승리였다.
로스코 채플 (Rothko Chapel) — 1971년
로스코가 평생 꿈꾼 것은 자신의 그림만으로 채워진 작은 공간이었다. 그는 그룹전을 싫어했다. 옆에 어떤 그림이 걸리는가에 매우 예민했다. 자신의 그림이 온전히 그 자체로 경험되기를 원했다.
1964년, 텍사스 휴스턴의 드 메닐(de Menil) 가족이 그에게 예배당을 위한 벽화 시리즈를 의뢰했다. 종파를 초월한 묵상의 공간. 로스코는 1964~1967년에 걸쳐 14점의 거대한 어두운 색면화를 그렸다. 거의 검정에 가까운 색들. 〈Rothko Chapel〉.
예배당은 1971년 — 로스코 사후 1년 — 에 정식 개관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종교적 경험을 한다는 그곳. 어두운 색면 14점이 8각형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매년 수십만 명이 순례하듯 그곳을 찾는다. 한 화가가 평생 꿈꾼 자신의 그림만으로 채워진 영적 공간이 마침내 그가 죽은 직후 완성된 것이다.
1968년 — 대동맥류, 그리고 종이 위의 작업
1968년 로스코에게 대동맥류(aortic aneurysm) 가 발병했다. 거대한 캔버스를 그리려면 사다리에 올라가야 했지만, 의사는 그것을 금했다. 그는 1968년 이후 주로 종이 위에 작업하기 시작했다. 작은 크기의 작업들. 종종 패널이나 직물 위에 설치되어 틀 없는 캔버스화처럼 보이도록 만든 작품들.
이 시기 그의 색은 점점 검정과 회색으로 어두워졌다. 마지막 시리즈인 〈Black on Gray〉(1969~1970) — 위쪽은 검정, 아래쪽은 회색. 지평선처럼 보이는 그림들. 어떤 평론가는 그것을 "죽음의 풍경" 이라 불렀다.
1970년 2월 25일 — 자살
1970년 2월 25일 아침, 로스코는 뉴욕 자신의 작업실에서 항우울제 과다복용과 팔의 동맥을 자른 채 발견되었다. 66세. 자살이었다.
그의 마지막 시기는 어두웠다. 우울증, 알코올, 결혼 생활의 파탄. 두 번째 부인 멜 비스틀과 1969년 별거에 들어갔다. 1968년 대동맥류 이후 거대한 작품을 그릴 수 없게 된 좌절. 자신의 그림이 부유한 컬렉터들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소비되는 데 대한 깊은 환멸.
그의 죽음 후 사상 최악의 미술계 스캔들 중 하나가 일어났다. 그의 작품을 관리하던 말보로 갤러리가 그가 남긴 유산 — 약 800점의 작품 — 을 헐값에 가족 몰래 매각한 것이 드러났다. 딸 케이트 로스코가 소송을 제기해 1975년 법원이 갤러리에 9,2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미술사에서 가장 큰 유산 분쟁 중 하나.
폴록과의 비교 —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두 정점
같은 시대 같은 뉴욕의 두 거장, 폴록(1912~1956)과 로스코(1903~1970).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두 정점.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다기보다 서로 다른 길을 간 동료였다. 1949년 폴록이 〈LIFE〉 표지로 폭발적 명성을 얻었을 때, 로스코는 자신의 색면 추상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미학은 정반대였지만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 유럽이 지배해 온 미술의 중심을 미국으로 옮기겠다는 결심.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
로스코가 평생 한 말 중 가장 신비로운 것이 있다.
"내 그림과 관람객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영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운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기록된 사실이다. 휴스턴 로스코 채플, 런던 테이트 모던 시그램 룸, 워싱턴 D.C. 필립스 컬렉션 로스코 룸 — 이 순례지들에서 사람들은 종종 운다. 자신도 영문 모른 채.
왜 그런가? 로스코의 색면이 직접적으로 인간의 심층 감정을 자극한다는 가설이 있다. 빨강이 일으키는 격정, 보라가 일으키는 우울, 검정이 일으키는 공포 — 그가 평생을 들여 만든 색의 깊이가 보는 사람의 무의식과 직접 만난다는 것. 추상화 비판자들의 말과 정반대로, 로스코의 그림은 감정적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미술이었다.
한국에서 만나는 로스코
- 2015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마크 로스코展〉 — 한국 최초의 대형 단독 전시. 약 50점. 30만 명 이상 관람.
- 2025년 노원문화재단 〈뉴욕의 거장들: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친구들〉
-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호암미술관 등 — 로스코의 직접 작품은 없음. 그의 영향을 받은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 전시
- 진품을 보려면 MoMA, 메트로폴리탄, 워싱턴 국립미술관, 필립스 컬렉션, 휴스턴 로스코 채플, 런던 테이트 모던 등을 방문해야 한다.
마치며 — 색이 들려주는 노래
로스코가 세상을 떠난 지 55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색면 앞에서 사람들이 우는 일은 계속된다. 한국 단색화 — 이배의 검정, 박서보의 묘법, 김환기의 점화 — 가 추구한 "단순한 표면 안의 깊이" 라는 미학은 사실 로스코와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세계 미술이 동·서양 두 갈래로 비슷한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 — 그것이 로스코의 가장 깊은 유산이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켈리가 형태의 단순함에 도달했다면, 로스코는 감정의 단순함에 도달했다. 두 사람 모두 거대한 캔버스에 한두 가지 색만 칠했지만, 켈리의 색이 기쁨에 가깝다면 로스코의 색은 사색에 가까웠다. 같은 추상이지만 정반대 자리에서.
다음에 로스코의 그림 앞에 설 일이 있다면 —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적당한 거리에서 잠깐만 머물러 보시길. 5분이라도 좋다. 처음에는 그저 두 색의 사각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흐릿한 경계 안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 당신만이 안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로스코가 원했던 일이다. 그림이 사람과 만나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비극, 황홀경, 운명 — 그것이 내가 관심 있는 전부다."
— Mark Roth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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