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보는 일을 의심하는 회화
게르하르트 리히터: 보는 일을 의심하는 회화
먼저 흐릿한 흑백 회화 한 점을 떠올려 보자. 캔버스에 그려진 한 사람의 옆모습이 마치 어긋난 사진처럼 번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디테일이 더 분명해질 거라 기대하지만, 가까울수록 형태는 오히려 무너진다. 다음으로 같은 작가의 추상화 한 점을 떠올려 보자. 폭이 몇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 위에 빨강, 노랑, 초록, 회색이 거대한 고무 주걱(스퀴지)에 의해 한꺼번에 쓸려 있다. 어떤 형태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두 작품 모두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60년 화업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 하나에 가깝다. 그림은 무엇을 보여 줄 수 있고, 무엇을 보여 줄 수 없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년 독일 드레스덴 출생)는 동독에서 자라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를 배웠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망명해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 다시 입학했다. 그의 청년기는 두 개의 독일과 두 개의 회화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노동자와 영웅을 그리는 동독식 사실주의가, 다른 한쪽에는 추상 표현주의와 팝아트로 들썩이던 서구 미술이 있었다. 그는 어느 쪽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작업과,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색을 펼치는 작업을 평생 오갔다. 오늘날 그는 생존 화가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인물 중 한 명이지만, 정작 그의 작업은 회화의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으로 채워져 있다.
사진 회화 — 이미지를 의심하는 방법
1960년대 초, 리히터는 신문이나 가족 앨범에서 사진을 골라 그것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정확하게 그린 뒤, 마지막에 부드러운 붓으로 화면 전체를 가만히 쓸어 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 결과물은 사진 같지도, 회화 같지도 않다. 사진의 기계적 객관성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회화가 가진 표현적 자아도 무력화한 자리. 그는 이 방식으로 자기 가족, 익명의 풍경, 비행기 폭격 장면, 적군파(RAF) 멤버들을 그렸다. 1988년 연작 《1977년 10월 18일》은 슈탐하임 감옥에서 의문사한 적군파 활동가들의 시신과 체포 장면을 옮긴 15점의 회화다. 그는 정치적 입장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회가 한 사건의 이미지를 어떻게 소비하고 잊어 가는지를 회화의 흐릿함 속에 봉인했다.
스퀴지 추상화 — 의도를 놓는 일
1980년대 이후 리히터는 거대한 추상회화 연작을 시작한다. 두꺼운 물감을 캔버스에 쌓고, 길이가 몇 미터에 달하는 고무 주걱으로 그것을 한 번에 쓸어내린다.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색의 선택과 주걱의 압력뿐, 결과는 매번 우연에 가깝다. 이 우연 위에 다시 색을 쌓고 다시 쓸어낸다. 화면은 점차 두꺼워지고 깊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 연작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사진 회화를 계속 이어 갔다는 점이다. 그에게 사진 회화와 추상화는 정반대가 아니라 같은 질문의 두 얼굴이었다. 한쪽에서는 이미지가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음을 보여 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미를 비운 자리에서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비르케나우 —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다
2014년 작 《비르케나우》는 그의 후기 작업 중 가장 무거운 자리를 차지한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가스실에서 한 유대인 노동자(존더코만도)가 몰래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출발점으로, 리히터는 그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긴 뒤, 다시 그 위를 추상화의 방법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결과물은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가장 끔찍한 장면이 묻혀 있다. 보이지 않게 묻은 것이 진짜로 사라진 것일까. 작가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떠넘긴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 했을 때 회화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는 그 두꺼운 색의 층위 안에 봉인해 두었다.
글을 마치며
리히터의 작업실에서는 늘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 사진을 옮기고, 색을 펼친다. 표면에 무언가를 쌓고, 다시 그 위를 쓸어낸다. 그 사이에서 회화는 늘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자명한 한 장의 이미지가 진실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흐릿해지고 어긋나고 다시 덮이는 그 모든 과정 속에 오히려 진실이 깃든다. 60년이 넘는 그의 작업이 천천히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이 한 줄로 모인다.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워질 때, 바로 그 막막함이 그가 우리에게 마련해 둔 자리다. 그는 한 번도 명료한 회화를 그리려 하지 않았다. 명료함을 의심하는 회화, 그것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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