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위의 시(詩) — 사이 톰블리(Cy Twombly), 낙서가 신화가 될 때
칠판 위의 시(詩) — 사이 톰블리, 낙서가 신화가 될 때
들어가며
캔버스가 거대하다. 그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휘갈긴 선들. 알아볼 수 없는 글씨. 군데군데 묻은 물감 자국. 어딘가에 Apollo, Achilles, Venus 같은 단어가 흐릿하게 적혀 있다. 이게 미술인가, 아이의 낙서인가?
처음 보는 사람은 당황한다. 그러나 다시 본다. 그리고 또 본다. 무언가가 그 안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폭풍 같은 감정, 고대의 전쟁, 사랑의 비명, 시간의 흐름.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 의 그림이다. 가장 추상적인 동시에 가장 서사적인 화가. 가장 자유롭게 휘갈긴 선이 어떻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트로이의 50일을, 트로이 멸망의 비명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람.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 대중문화의 표면을 그렸다면, 톰블리는 정반대로 갔다. 그는 고대로, 신화로, 시(詩)로 향했다. 같은 1950년대 뉴욕에서 시작했지만, 그는 미국을 떠나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버지니아의 소년, 블랙마운틴의 청년
1928년 4월 25일,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에서 태어난 톰블리의 본명은 에드윈 파커 트웜블리 주니어(Edwin Parker Twombly Jr.). 그러나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 사이 영(Cy Young)에서 따온 별명 "사이" 로 불렸고, 그것이 평생 그의 이름이 되었다.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것은 블랙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 였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이 전설적인 실험 예술학교에서 1951년 그는 평생의 친구이자 동료 —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 — 를 만난다. 작곡가 존 케이지, 무용가 머스 커닝햄도 그 시기 그곳을 거쳐갔다. 미국 전후 미술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한 학교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었다.
23세의 톰블리는 이미 뉴욕 새뮤얼 쿠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일찍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길을 택한다.
군 복무, 그리고 암호의 발견
1953~1954년, 톰블리는 미군에서 복무했다 — 그것도 암호 해독원(cryptographer) 으로. 매일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 이 경험은 그의 평생 작업을 결정짓는다.
후일 그가 캔버스 위에 그린 휘갈긴 선들과 알 수 없는 글씨들 — 그것은 미해독의 암호처럼 보였다.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즉시 잡히지 않는다. 톰블리는 그 "보일 듯 안 보이는 의미" 의 가장자리에 평생 머물렀다.
이탈리아로 — 1957년의 결정적 이주
1957년, 29세의 톰블리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1959년에는 로마로 작업실을 영구히 옮겼고, 이후 50여 년의 인생을 이탈리아에서 보낸다. 미국 추상표현주의가 뉴욕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시기, 그는 정반대로 향했다.
이탈리아는 그에게 고대를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로마의 폐허, 폼페이의 벽화, 베수비오 산. 그리스 신화, 호메로스의 서사시, 라틴 시. 미국에서 그가 가졌던 "무엇을 그릴 것인가" 의 답이 거기서 발견됐다 — 시간의 두께.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이는 그의 선들이 어떻게 수천 년의 신화적 깊이를 담을 수 있는지가 그곳에서 가능해졌다.
〈Untitled (New York City)〉(1968) — 흑판 그림
1960년대 후반, 톰블리는 그의 가장 상징적인 시리즈를 시작한다. 〈Blackboard Paintings(흑판 그림)〉. 거대한 회색 캔버스 위에 흰 크레용으로 그어진 일정한 곡선들이 끝없이 반복된다. 마치 학교 칠판 위의 필기 연습처럼.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한 손이 그어가는 그 곡선의 떨림, 멈춤, 빠르기와 느림 안에 한 인간의 시간이 흐른다. 글쓰기 이전의 글쓰기, 의미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표시. 이 시리즈 중 〈Untitled (New York City)〉(1968) 은 2015년 소더비 경매에서 7,053만 달러에 낙찰되어 한동안 그의 최고가 기록이 되었다.
〈Fifty Days at Iliam〉(1978) — 50일간의 트로이
1978년, 톰블리가 50세 되던 해, 기념비적 작품이 탄생한다. 〈Fifty Days at Iliam(일리암에서의 50일)〉.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바탕으로 한 10점의 거대한 캔버스 연작.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50일을 추상적 회화로 옮긴 작업이다.
화면 가득 휘갈긴 선들, 떨어진 핏빛 물감 자국, 그리고 군데군데 적혀 있는 영웅들의 이름 — Achilles, Hector, Patroclus. 어떤 장면도 직접 그리지 않으면서, 그는 전쟁의 모든 감정 — 분노, 비애, 두려움, 영광 — 을 캔버스 위에 옮겼다.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 전용 전시실에 영구 설치되어 있어, 관람객은 10점의 캔버스가 만드는 거대한 서사시 한가운데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Lepanto〉(2001) —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2001년, 73세의 톰블리는 제4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평생 공로상) 을 수상한다. 그가 그 자리에 출품한 작품은 12점의 거대한 캔버스로 구성된 〈Lepanto〉 — 1571년 베네치아 함대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레판토 해전을 주제로 한 연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Lepanto〉에는 아군도 적군도, 승자도 패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불꽃처럼 폭발하는 색채와 휘갈긴 선들만이 캔버스를 채운다. 베니스인들에게 자신들의 가장 영광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도록 유도하는" 추상의 역사화. 12점은 현재 뮌헨 브란트호르스트 미술관 전용 전시실에 영구 설치되어 있다.
후기 — 색의 폭발
70대 후반의 톰블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평생 회색조의 차분한 작업을 해온 그가 갑자기 강렬한 원색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Roses〉(2008), 〈Camino Real〉(2010), 〈Leaving Paphos Ringed with Waves〉(2009). 빨강, 노랑, 분홍이 캔버스 위에 흘러내린다. 어떤 화가들은 끝에 다다라 자신이 평생 사용하지 않던 색을 쓴다 — 마치 마지막 환희처럼. 톰블리도 그랬다.
2011년 — 로마에서의 죽음
2011년 7월 5일, 사이 톰블리는 그가 사랑한 도시 로마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 평생 그의 곁을 지킨 동반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사가 니콜라 델 로쇼(Nicola Del Roscio) 였다. 그는 톰블리 재단의 책임자가 되어 작가의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키스 해링의 헌사 — 〈Untitled for Cy Twombly〉
흥미로운 사실 하나. 키스 해링은 톰블리에게 헌정된 작품을 그렸다. 〈Untitled for Cy Twombly〉(1988). 1980년대 뉴욕 거리 그래피티의 대표 작가가 자신의 미학적 선조에게 보낸 헌사. 톰블리의 휘갈긴 선이 어떻게 그래피티 세대 — 바스키아와 해링 — 에게 길을 열어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의 계보가 톰블리에서 갈라진다. 그는 "낙서를 미술로 만든 첫 번째 사람" 이었다. 바스키아와 해링이 거리의 분필과 페인트로 한 일을 그는 이미 30년 전 캔버스에서 시작했다.
마치며 — 의미와 의미 너머
톰블리의 그림 앞에 처음 서면 누구나 묻는다. "이게 뭘 그린 거지?"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톰블리의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보다 어떻게 시간을 견디는가에 관한 것이다. 한 손이 캔버스 위를 지나가는 동안, 한 인간의 호흡과 떨림과 망설임이 거기 새겨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가까이서 봐야 한다. 멀리서는 낙서지만, 가까이서는 그것이 한 사람이 살아낸 한 순간의 흔적임이 보인다.
그가 그린 것은 그리스 신화도, 트로이 전쟁도, 베네치아의 함대도 아니다. 그것을 통과한 한 인간의 감정이었다. 거대한 시간 앞에 선 한 손의 떨림, 그것이 그의 미술이다.
"감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 Cy Twomb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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