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편지를 쓰는 작가 — 갈라 포라스 김의 정직한 질문들
박물관에 편지를 쓰는 작가 — 갈라 포라스 김의 정직한 질문들
들어가며
박물관 진열장 너머 유리 안쪽.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놓인 청동기 시대의 토기. 라벨에는 "기원전 1세기, 출토지: 광주 신창동"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유물"이라 부르고, 보존하고, 관람한다. 하지만 — 그 토기 안에 한때 누군가의 곡식이 담겼고, 누군가의 손이 빚었고,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묻혔다는 사실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그것은 정말 사물(object) 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삶의 일부였던 것을 우리가 사물로 만든 것인가?
이 질문을 평생의 작업으로 삼은 작가가 있다.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 1984~ ).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난 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그는 단지 작품을 그리고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박물관 관장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 보존윤리에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 언어의 소리를 LP로 만들고, 광주박물관에 잠든 2천 년 전 망자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청원한다.
미술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한국계 라틴아메리카 작가라는 정체성 때문이 아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이 우리 시대 가장 까다로운 윤리 문제 중 하나를 정확히 겨누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분류할 권리를 가지는가.
두 대륙, 두 성(姓)
이름부터 그의 정체성을 말한다. 포라스(Porras) 는 콜롬비아인 역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성, 김(Kim) 은 멕시코 식민지 시대 문학을 연구하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에서 따왔다. 1984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콜롬비아 각지로 연구 여행을 다녔고, 박물관에서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래서일까. 박물관은 그에게 두렵거나 권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친근한 장소가 되었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CalArts(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미술학 석사(MFA) 를 받고, UCLA에서 라틴아메리카 연구로 또 다른 석사(MA) 를 취득했다. 미술과 인류학·언어학·사학을 동시에 전공한 이 이중의 학적은 그의 작업 방법론을 그대로 설명한다. 그의 작업은 연구(research)이자 예술이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와 런던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으며, 예일대 미술대학원 조각과 시니어 크리틱으로도 재직 중이다.
작업의 핵심 — 박물관학에 던지는 질문
포라스-김의 작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사물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다."
그는 유물을 그리거나 다시 만들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 유물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유물이 어떻게 발굴되었고, 누가 그것을 박물관 소장품으로 등록했고, 어떤 분류 체계 아래 놓였고, 어떤 라벨이 붙었는지 — 그 모든 제도적 결정의 층위가 그의 진짜 주제다.
그래서 그의 전시장에는 이상한 것들이 함께 놓인다. 정교한 색연필 드로잉 옆에 박물관과 주고받은 편지 사본, 인증서, 보존사의 메모, 발굴 기록. 작품을 둘러싼 부속 문서들이 곧 작품의 일부다. 미술품과 연구 자료의 경계가 무너지고, 우리는 한 사물이 "유물"이 되기까지 거쳐 온 결정의 그물망 전체를 보게 된다.
대표 작업들
〈Reconstructed Southwest Artifact, ca 900/2017〉 — 2017 휘트니 비엔날레
이베이(eBay)에서 구입한 고대 도자기 파편 하나. 너무 오래되어 원래 모양을 알 수 없는 이 조각을 그는 박물관 보존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추정해서 복원한다. 그러나 이 복원은 단지 "맞는 모양"이 아니다. 어떤 가설을 따르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제목의 'ca 900/2017'이 흥미롭다. 인증서가 표시한 추정 연대는 약 900년경. 그러나 2017년은 그가 이것을 재구축한 해, 즉 이 사물이 다시 한번 태어난 해다. 한 사물이 두 개의 출생일을 갖는 셈이다. 유물이자 동시에 조각, 진본이자 동시에 해석 — 사물의 정체성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A terminal escape from the place that blinds us〉 — 2021 광주비엔날레
광주 신창동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 인간 유해를 둘러싼 작업. 두 점의 대형 드로잉과 함께 그는 국립광주박물관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썼다.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유해는 유물이 아니다. 그는 한때 사람이었고, 박물관에 전시되기를 동의한 적이 없다. 그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해달라.
이 작업은 박물관학에서 가장 첨예한 윤리 문제 — 인간 유해를 사물로 다루는 관행 — 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박물관이 학술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시신을 분류·전시·보관하는 일은 과연 정당한가? 죽은 자에게는 자기 사후를 결정할 권리가 없는가? 흥미롭게도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유해를 비교적 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편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의 질문은 한 박물관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의 박물관 제도 전체를 향한다.
〈국보 530점〉 — 2023 리움미술관 《갈라 포라스-김: 국보》
리움미술관의 M1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전시는 한국 관람객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업 중 하나다. 남한과 북한이 각각 지정한 국보들을 번호 순으로 한 화면에 합쳐 그린 거대한 색연필 드로잉. 같은 민족,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고 말하면서도 두 체제는 각기 다른 사물을 "최고의 유산"으로 지정해 왔다.
그가 묻는 것은 단순하다. "국보"란 무엇인가. 시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만든 것이며, 같은 사물이 한쪽에서는 보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등록조차 되지 않는다. 이 드로잉은 책가도(冊架圖)의 형식을 빌려 사물들을 가지런히 선반 위에 배치하지만, 그 가지런함은 언제든 흐트러질 수 있는 임의성을 폭로한다.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The Weight of a Patina of Time)〉 — 2023 〈올해의 작가상〉
세 폭의 대형 드로잉. 모두 같은 대상, 전북 고창의 고인돌을 그리지만, 각각 다른 시점에서 본 풍경이다.
- 첫 번째: 흑연으로 빼곡히 채운, 거의 빛이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 고인돌 밑에 묻힌 사람의 시점, 즉 죽은 자가 보는 어둠.
- 두 번째: 풀과 나무에 둘러싸인 고인돌의 사진처럼 사실적인 흑백 묘사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간의 시점.
- 세 번째: 색연필과 밀랍으로 그린 추상적 패턴 — 고인돌 표면에 수천 년 자라온 이끼와 자연의 시점.
같은 돌이 누구에게는 무덤이고, 누구에게는 유산이며, 누구에게는 서식지다. 하나의 사물은 한 가지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시간은 그 위에 층층이 다른 의미를 쌓아간다. 작가는 이를 "세월의 무게" 라 부른다.
〈Signal〉 시리즈 — 습기와의 협업
박물관에서 습기는 곧 적이다.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미술관은 온도와 습도를 정밀하게 통제하려 든다. 하지만 포라스-김은 정반대로 간다. 산업용 제습기로 전시장의 습기를 모아, 그것을 액상 흑연에 적신 천 위로 흘려 패널에 무작위 패턴을 만든다.
각 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진 전시 공간의 기후, 관람객 수, 호흡 — 그러니까 그 공간 자체의 보이지 않는 활력을 기록한다. 사라지지 않는 보존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록으로서의 작품. 박물관이 안간힘으로 막으려는 그 자연의 변화 자체가 작품이 된다.
〈휘파람과 언어 변용〉 — 2012, LP 음반
초기작이자 그의 또 다른 관심사인 언어를 다룬 작업. 멕시코 일부 산간 지역에 남아 있는 휘파람 언어 — 음성 언어의 음높이를 휘파람으로 옮긴 — 를 LP 레코드에 담았다. 이는 단순한 민속 기록이 아니다. 사라지거나 해독되지 않은 정보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들리지만 의미를 모르는 것은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에 대한 사유다.
〈자연 형태를 담는 조건〉 — 2025 국제갤러리 첫 개인전
2025년 9월~10월 국제갤러리 K1에서 열린 이 전시는 그의 한국 갤러리 첫 개인전이었다. 부제는 "Conditions for holding a natural form".
전시는 두 공간으로 나뉘었다. 한쪽 벽에는 앞서 소개한 〈Signal〉 연작이, 다른 한쪽에는 수석(壽石/水石) 을 소재로 한 신작 드로잉들이 놓였다.
수석은 한국과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자연이 빚어낸 작은 돌을 가져와 받침대에 올리고, '동물 모양의 돌', '신성한 돌', '균형 잡힌 돌' 처럼 분류해 감상한다. 작가는 여기에 자신만의 새로운 분류 — 예컨대 〈우주에서 온 돌 15점〉 같은 카테고리 — 를 더하며, 정교한 색연필 묘사로 돌들을 책거리(책가도) 양식 위에 늘어놓았다. 전시장에는 작가가 직접 초대한 수석 수집가들의 실제 소장품도 함께 놓였다. 사람마다 다른 분류, 다른 사연, 다른 애정의 방식이 한 전시장 안에 공존하면서, 자연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얼마나 임의적이면서 동시에 절실한 인간의 행위인지를 보여줬다.
한국 미술계의 발견 — 두 기관, 한 작가
2023년은 그의 한국 활동에서 결정적인 해였다. 같은 시기 두 개의 굵직한 전시가 동시에 열렸다.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 권병준, 이강승, 전소정과 함께 후원작가 4인에 선정.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올해의 작가상〉이 이번부터 한국 국적 미술가에서 한국계 해외 미술가까지 대상을 확장했고, 그가 그 첫 수혜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 리움미술관 M1 프로젝트 〈갈라 포라스-김: 국보〉 —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는 리움의 정체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협업.
한국에서는 '미술관(art museum)'과 '박물관(museum)'이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지만, 영어권에서는 둘 다 'museum'이다. 그가 두 종류의 기관에 동시에 작품을 펼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업 자체가 두 기관 사이의 경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2025년 — 맥아더 '천재상' 수상
그리고 2025년 10월, 결정적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미국 맥아더 펠로우(MacArthur Fellow) 로 선정된 것이다. 흔히 '천재상(Genius Grant)'으로 불리는 이 펠로우십은 별다른 조건 없이 향후 5년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80만 달러(약 11억 원) 의 상금을 수여한다. 신청서 같은 것은 없다. 이름이 비밀리에 추천되고, 수상자는 통보를 받기 전까지 자신이 후보였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미국에서 한 예술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상 중 하나다.
22명의 2025년 수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41세, 한 작가의 경력에서 절정으로 향하는 시기다.
마치며 — 사물의 사후세계를 묻는 일
이우환과 이배가 동양적 사유를 캔버스 위 점과 선과 검정으로 번역했다면, 도널드 저드가 사물 자체를 미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면, 갈라 포라스-김은 그 사물이 어떻게 거기 놓이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그의 작업은 미술 이전에 윤리이고, 미술품 이전에 편지다.
박물관은 우리 문명이 만든 가장 거대한 분류 시스템이다. 무엇이 보존할 가치가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사물인가. 무엇이 우리 것이고, 무엇이 그들 것인가. 박물관은 매일 이 결정을 내리고 있고, 우리는 대개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포라스-김은 그 결정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정중하게 편지를 쓰고, 정교하게 드로잉을 그리고, 습도계의 숫자를 모은다. 그의 작업은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천천히, 정확하게 묻는다. 왜 이렇게 분류했나요? 누구의 합의로 그렇게 정했나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리고 묘하게도, 그 질문 끝에 우리는 깨닫는다. 박물관에 묻혀 있는 것은 유물만이 아니다. 선택되지 못한 모든 가능성, 다르게 분류될 수 있었던 모든 사물의 다른 운명이 함께 묻혀 있다. 그것을 다시 꺼내 보여주는 것 — 이것이 갈라 포라스-김이 하는 일이다.
다음에 박물관에 갈 일이 있다면, 진열장 안의 사물 옆에 붙은 라벨을 천천히 읽어보길. 누가 그것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는지,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됐는지를. 그 라벨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어딘가에, 한 콜롬비아-한국계 작가가 조용히 던진 질문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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