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에 새긴 한국 — 박수근, 가난한 이웃을 사랑한 화가

 

화강암에 새긴 한국 — 박수근, 가난한 이웃을 사랑한 화가

들어가며

캔버스 표면이 거칠다. 화강암을 만지는 듯한 까칠한 질감. 그 위에 굵고 우직한 검은 선으로 그려진 형상들 — 빨래하는 여인들, 절구질하는 어머니, 아이를 업은 소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낙, 길가에 앉은 노인. 화려한 색은 없다. 회백색과 황갈색의 단조로운 색조. 원근법도 명암도 없다. 그러나 그 단순함 안에는 어떤 깊은 정직함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거친 마티에르 속에 박힌 인물들이 마치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처럼 영원히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 김환기와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 2세대를 대표하는 화가. 국민화가라 불리는 사람. 그러나 그가 평생 살아낸 시간은 가난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다. 51세의 짧은 생, 평생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한 화가. 그가 죽은 뒤에야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작은 캔버스들이 얼마나 영원한 것을 담고 있었는지 알아챘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김환기가 그리움의 점을, 유영국이 고향의 산을, 장욱진이 동심의 까치를 그렸다면, 박수근은 가장 평범한 한국인의 일상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가장 자주 만나는 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우리가 어릴 때 살았던 골목길 어딘가의 풍경 안이다.


양구의 가난한 소년

1914년 2월 21일,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맏이. 어린 시절 그의 집은 비교적 부유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12세 무렵, 그는 학교 교과서에서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만종(晚鐘)〉 을 보았다. 들판에서 일하다 종소리에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그림. 가난한 시골 소년의 마음에 이 그림이 평생을 결정짓는다. "나도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겠다." 그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 가난한 이웃들의 진솔한 일상이었다.


1932년 —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독학자의 운명을 바꿀 사건이 일어났다. 1932년, 18세의 박수근이 수채화 〈봄이 오다〉를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에 출품해 입선했다. 이때부터 1944년 마지막 회까지, 그는 매년 선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발판을 다졌다.

가난해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종이에 그렸다. 그래서 그가 평생 남긴 작품 중에는 작은 소품이 많다. 그러나 그 작은 화폭에 담긴 진심이 평범한 큰 그림보다 더 무거웠다.


빨래터에서 만난 사람 — 김복순

26세 무렵, 박수근은 아버지가 재혼해 살고 있는 김화군 금성의 집에 갔다가, 빨래터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김복순. 그 자리에서 그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의사 집안 아들과의 약혼을 추진 중이었다. 박수근은 상사병으로 몸져 누웠다.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김복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편지가 통했다. 1940년 2월 10일, 두 사람은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김복순은 평생 그의 가장 정직한 모델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박수근의 그림 속 빨래하는 여인들, 절구질하는 어머니들 — 그녀들의 모습 안에 김복순이 있다. 그가 평생 그린 것은 결국 자기 아내, 그리고 그녀로 대표되는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었다.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 PX의 화가

해방 후 박수근은 평양 도청 사회과 서기로 일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한다. 전쟁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이후 그의 삶은 헐값으로 화방에 그림을 팔아 겨우 생계를 잇는 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군 PX(매점)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자리를 얻었다. 미군들이 사진을 가져오면, 그는 그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한 점에 단돈 몇 달러. 그러나 그것이 그의 생계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 회계 담당 여직원을 만난다. 후일 한국 문학사를 빛낼 소설가 박완서(朴婉緒). 박완서는 박수근이 사망한 후 5년이 지난 1970년, 그를 모델로 한 데뷔 소설 〈나목(裸木)〉 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미군 PX에서 그림을 그리던 가난한 화가 옥희도" — 그가 박수근이었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아예 박수근이라는 본명으로 등장한다.

박완서는 후일 회고했다.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제야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화가의 죽음이 한 소설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마티에르 — 화강암의 표면

전후 박수근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휴전 후 다시 열린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에서 1953년 〈우물가〉가 특선, 〈노상에서〉가 입선하며 그는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평생 트레이드마크가 될 마티에르(matière, 질감) 기법이 이 시기에 완성된다.

박수근의 화면은 마치 화강암 표면을 만지는 듯 거칠다. 그가 어떻게 이런 표면을 만들었는가? 비밀은 층층이 쌓아 올린 물감에 있다. 붓과 나이프를 사용해 자잘하고 까칠한 물감의 층을 미묘하게 거듭 고착시키는 방식. 한 번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물감을 쌓고 또 쌓아 올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표면 위에 굵고 우직한 검은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그린다.

이 마티에르는 한국적 풍경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한국의 돌담, 화강석, 토담을 사랑했다. 그것들의 거친 표면이 그대로 캔버스가 된 셈이다. 어떤 평론가는 그의 그림을 "바위에 새긴 암각화" 라고 표현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화면 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표면 안에 영원히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티프 — 평범한 한국인의 일상

박수근이 그린 것은 한정된 어휘다. 그러나 그 안에 한국 서민의 모든 풍경이 들어 있다.

  • 빨래하는 여인들 — 〈빨래터〉(1954) 등 여러 점
  • 절구질하는 여인 — 〈절구질하는 여인〉(1952)
  • 시장의 아낙들 — 〈시장의 사람들〉, 〈노상〉
  • 아이를 업은 소녀 — 〈애기 업은 소녀〉
  • 고목과 사람들 — 〈고목과 여인〉(1964)
  • 귀가하는 사람들 — 〈귀가〉(1962)

그가 그린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다. 영웅도, 미인도, 부자도 없다. 빨래터에 모인 동네 아낙들, 시장에서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 아이를 업은 누나, 길가에 앉은 노인. 이름 없는 한국인들.

흥미로운 사실 —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윤곽선만으로 그려져 있어, 인물의 개성보다 그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강조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누군가의 누나이자, 누군가의 할머니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서적 가족이 거기 있다.


1957년 — 낙선의 충격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연이어 국전에서 입선하던 그가,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낙선한다. 야심차게 100호의 대작을 출품했지만 떨어진 것이다. 당시 국전이 화가 인생의 거의 전부였던 시절, 그의 충격은 컸다. 이때부터 그는 폭음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국전을 떠난 그에게 다행히도 새로운 후원자들이 나타났다. 주한 미국 외교관의 부인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er) 여사. 그녀는 박수근의 작품에 깊이 빠져, 그의 그림을 수십 점 소장하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아틀리에 탐방까지 만들었다. 귀국 후에도 그녀는 편지로 박수근의 그림을 사들였다. 박수근은 그림 값으로 대신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좋은 물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 양구 박수근미술관에는 밀러 여사의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다. 가난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알아본 한 외국인의 눈이 거기 새겨져 있다.


1965년 — 51세의 죽음

1959년 그는 제8회 국전 추천작가가 되고, 제11회 국전 심사위원이 된다. 1958년에는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 등 국제 무대에도 진출한다. 이제 막 화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병마가 찾아왔다.

간경화와 백내장이 그를 동시에 덮쳤다.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상태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은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못한 채였다.


사후의 발견

박수근의 진짜 명성은 그가 죽은 뒤에 시작됐다.

  •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유작전
  •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두 번째 유작전 — 박완서가 이 전시를 보고 〈나목〉을 썼다

이 두 유작전을 계기로 그는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 독창성을 발휘한 작가" 로 재평가된다. 1980년대 이후 그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은 한국 미술 시장의 정점에 섰다.


시장이 말하는 박수근

  • 2006년 12월 케이옥션, 〈노상〉, 10억 4천만 원 — 당시 한국 미술품 최고가
  • 2007년 3월 〈시장의 사람들〉, 25억 원 — 기록 경신
  • 2007년 5월 〈빨래터〉, 45억 2천만 원 — 다시 기록 경신 (이후 진위 논쟁이 있었지만 법원이 진품으로 판정)

이 시기 한국 미술 시장 최고가는 박수근과 김환기가 번갈아 갱신하고 있었다. 두 거장이 한국 미술의 두 정점에 서 있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미학은 정반대 — 김환기가 우주적 점을 그렸다면, 박수근은 지상의 사람들을 그렸다.


한국에서 만나는 박수근

  •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강원 양구) — 그의 생가 터에 세워진 미술관. 짙은 화강석을 켜켜이 쌓아 올린 건축이 그의 마티에르를 닮았다. 2002년 개관. 2020년에는 어린이 미술관도 추가로 개관.
  • 삼성미술관 리움 — 〈빨래터〉(1954) 등 주요 유화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 다수 작품 소장. 정기적인 특별전 개최
  • 연세대학교 박물관 — 김병철 회장 기증 작품들

마치며 —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

박수근이 직접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한 문장이 그의 평생 미학을 요약한다. 워홀이 마릴린의 표면을, 바스키아가 흑인 영웅의 왕관을 그릴 때, 박수근은 빨래터의 평범한 어머니들을 그렸다. 그것이 그가 평생 알아낸 가장 정직한 진실이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일상 안에 선함과 진실함이 있다는 것.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중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선다. 가장 작은 그림으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가장 거친 캔버스 위에 그렸다. 그러나 그 낮은 자리야말로 가장 영원한 자리였다는 것을 그가 죽은 뒤 한국인들이 알아챘다.

다음에 그의 빨래터 앞에 설 일이 있다면, 캔버스에 가까이 다가가 그 거친 표면을 천천히 들여다보시길. 거기 우리 어머니들이, 할머니들이, 누나들이 있다. 박수근이 평생 그린 것은 이름 없는 한국 그 자체였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 박수근, 김복순에게 보낸 청혼 편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 박수근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단 하나의 수직선 —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캔버스에 숭고를 그은 사람

문경원 & 전준호: 미지에서 온 질문들

색이 우는 곳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