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구워 영원을 빚다 — 권진규, 동선동 아틀리에의 천재 조각가

 

흙을 구워 영원을 빚다 — 권진규, 동선동 아틀리에의 천재 조각가

들어가며

거친 표면의 작은 흉상. 가늘고 긴 목, 깊이 팬 눈자위, 광대뼈가 도드라진 마른 얼굴. 색은 붉은 갈색, 흙의 빛깔. 표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요하다. 슬픈 것 같기도, 평온한 것 같기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가까이 다가가 그 표면을 만지면 손끝에 거친 흙의 결이 닿는다. 이것은 청동이 아니다. 대리석도 아니다. 구운 흙 — 테라코타(terra-cotta)다.

권진규(權鎭圭, 1922~1973). 한국 근현대 조각의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빛나는 이름. 김환기·이중섭·박수근이 회화의 거장들이었다면, 권진규는 조각의 자리에서 그들과 같은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러나 그의 평생은 시대와 어긋났다. 1960~70년대 한국 조각계가 추상조각·용접조각으로 휩쓸려 갈 때, 그는 홀로 고대의 기법인 테라코타로 흉상을 빚었다. 그래서 그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빚은 흉상들은 시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박수근(가장 한국적인 회화)과 이중섭(가장 비극적인 화가의 삶)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면, 거기 권진규가 있다. 51세의 짧은 생, 자결로 마감한 운명.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들은 그가 말한 그대로 "썩지 않는 테라코타" 처럼 영원하다.


함흥의 부유한 차남

1922년 4월 7일, 권진규는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박수근(가난한 양구 소년), 이중섭(부유했던 평안남도)과 비교하면 권진규의 출발은 이중섭과 비슷하다. 비교적 풍족한 어린 시절. 함흥제1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강원도 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고)에 다녔다.

1943년 4월, 21세의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일본의 태평양전쟁 징용에 끌려갔다. 히다치 다치가와 공장에서 일하다 1944년 도주해 함흥으로 돌아와 은신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이쾌대, 그리고 윤효중의 조수

1946년경 그는 월남해 서울 성북동에 머물면서 화가 이쾌대(1913~1965)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는 한국 근대미술의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었다 — 구본웅, 김환기, 이쾌대 등이 거기서 데뷔하거나 활동했다.

1947년에는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 작업에 조각가 윤효중(1917~1967) 의 조수로 참여한다. 거대한 불상을 직접 만지며 그는 흙과 형태에 대한 평생의 감각을 익혔다. 후일 그가 평생 불상영원성에 천착한 출발점이 거기 있었다.


도쿄 무사시노 — 부르델의 손자

1949년, 27세의 권진규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다(현 무사시노 미술대학).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무사시노에서 그가 만난 스승은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1897~1981). 시미즈는 프랑스의 거장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Antoine Bourdelle, 1861~1929) 의 직계 제자였다. 부르델은 로댕의 제자였으니, 권진규는 로댕 → 부르델 → 시미즈 → 권진규라는 직계 계보 안에 있었다. 부르델식의 강건하고 응축된 형태, 고대적 영원성에 대한 추구. 이 감각이 그의 평생을 관통한다.

그는 일본 화단에서 〈이과회(二科會)〉 전람회에서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연이어 입선했다. 1953년 출품한 〈기사〉, 〈마두 A〉, 〈마두 B〉특대(特待) 상을 받았다. 일본에서 그는 이미 인정받는 조각가였다.


1959년 귀국 — 그러나 시대는 어긋났다

13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1959년 귀국했다. 37세였다. 이때부터 그가 평생 살게 될 한국에서의 시간이 시작된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적 조형미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부르델식의 서구 조각 기법을 익혔지만, 한국에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결국 그가 도달한 것은 불상이었다. 인간의 근원적 형상과 부처의 형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그의 누이동생 권경숙이 후일 회고한 그의 말이 있다.

"내 마음이 평화롭고 편할 때에는 불상이 웃고 있고, 내 마음이 울적할 때에는 불상도 울고 있는 것 같다."

 

동선동 아틀리에 — 1959~1961년

귀국한 그가 직접 설계해 지은 작업실이 있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 3가 250번지의 권진규 아틀리에. 1959~1961년에 손수 지은 단층 건물 두 동(아틀리에와 살림채). 대지 83.6㎡, 건축 78.8㎡. 작은 건물이지만 거기에 우물과 가마가 있었다.

이 아틀리에가 그의 평생 작업이 이뤄진 곳이자, 그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2004년 등록문화재 134호로 지정됐고, 2006년 동생 권경숙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해 보존되고 있다. 한국에서 시민이 기증한 문화유산이 영구 보존된 첫 사례. 지금도 예약 방문이 가능하다.


테라코타 — 흙으로 영원을 빚다

1960년대 한국 조각계는 철재 용접 추상조각이 주류였다. 신재료, 신기법. 그 시대 분위기에 권진규는 정반대로 갔다. 그가 매달린 것은 테라코타 —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조각 기법 중 하나. "구운 흙".

그가 1971년 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의 평생 미학을 압축한다.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흙이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는 역설. 당대성에 갇히지 않는 근원적 영원성. 그것이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이었다.

테라코타 기법은 단순하지 않다. 먼저 찰흙으로 형태를 빚고, 그것을 석고 형틀로 떠내고, 다시 그 형틀에 흙을 채우되 속이 비도록 만들어 구울 때 터지지 않게 한다. 가마에서 500~700°C로 초벌구이. 권진규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가마까지 직접 만들어 모든 과정을 손수 해냈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 장인(匠人) 으로 불렀다. 옛날 이름 없는 장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에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테라코타와 함께 그가 사용한 또 하나의 기법은 건칠(乾漆) — 삼베에 옻칠을 발라 만드는 동양 전통 기법. 방부·방습·방충에 강한 이 기법 역시 영원성을 향한 그의 추구였다.


〈지원의 얼굴〉(1967) — 가장 사랑받는 흉상

권진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지원(志援)의 얼굴〉(1967). 홍익대 미술대학 강사로 출강하면서 모델이 된 여학생을 빚은 테라코타 흉상. 가늘고 긴 목, 길쭉한 얼굴, 정면을 응시하는 깊은 눈. 한 평론가의 말처럼 "고도로 절제된 긴장감과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조각을 통해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 한 작품.

흥미로운 점은 모델인 지원이 누구든, 권진규의 흉상에는 일관된 얼굴형이 있다는 것이다. 움푹 들어간 눈, 높은 콧대, 둥근 머리, 좁은 얼굴형. 한국인의 얼굴이라기보다 이상화된 얼굴. 그가 추구한 것은 한 개인의 사실적 초상이 아니라 순수한 영혼의 모습,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영원성이었다. 천경자가 모든 여인을 자기 자신으로 그렸다면, 권진규는 모든 모델을 그가 생각한 영원의 얼굴로 빚었다.


자소상(自塑像) — 자신의 얼굴

권진규가 평생 가장 많이 빚은 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자소상(自塑像). 마스크 형태의 자소상, 두상 자소상, 흉상 자소상까지.

가장 유명한 것은 〈가사(袈裟)를 입은 자소상〉. 승복인 가사를 두른 자기 모습. 구도자적인 금욕성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한 몸에 응축된 강렬한 자아 이미지. 권진규에게 자소상은 내적 고뇌의 표출이자 자아의 확인이었다. 그가 가장 잘 아는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빚고 또 빚으며 표현적 실험을 거듭했다.

마스크 형태의 자소상 한 점에는 그가 직접 쓴 글귀가 남아있다 — "呈 金廷帝 權鎭圭 作(정 김정제 권진규 작)". 자신의 제자에게 선물한다는 뜻. 자기 분신 같은 작품을 제자에게 건넨 그의 마음이 거기 있다.


1965년 첫 개인전 — 차가운 반향

1965년 9월, 43세의 권진규는 서울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출품작은 〈조국〉(석고), 〈입산〉(목조), 〈손〉(테라코타), 〈희구〉(테라코타) 등 45점. 그러나 예술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시 한국 화단의 주류였던 추상미술에 그의 구상 위주 소조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 차가운 반향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일본에서 인정받았던 조각가가 한국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조각가로 취급된 시간들. 그는 외로워졌다.


1968년 도쿄 니혼바시 화랑 — 일본의 사랑

1968년 7월, 서양화가 권옥연(1923~2011) 의 노력으로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이 열렸다. 출품작은 〈재회〉, 〈춘엽니(尼)〉, 〈지원의 얼굴〉, 〈싫어〉 등 테라코타 30점.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깊이 사랑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차가웠다.


1971년 명동화랑 — 좌절의 시작

1971년 12월, 명동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 테라코타 24점, 건칠 11점, 석조 3점. 그러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명동화랑 김문호 사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진행되던 사명대사 동상의 수주도 취소되었다.

권진규는 점점 무너졌다. 1972년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불상을 제작하며 마음을 추스리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몸에 병이 났다 — 고혈압, 신경성 수전증. 손이 떨려 흙을 만질 수 없게 되었다. 조각가에게 손이 떨린다는 것은 죽음과 같았다.


1973년 5월 4일 —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1973년 1월, 그에게 세상 살다 보니 생긴 별일 같은 일이 있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이규호 학예관이 그의 작품 두 점 — 〈마두〉와 〈가사를 두른 자소상〉 — 을 15만 원에 구입했다. 거의 팔리지 않던 그의 작품을 알아본 첫 공공기관이었다.

5월 3일 밤, 그는 박혜일의 휘경동 집에서 안동림(고려대 영문과 강사), 김정제(수도여사대 미술과 학생)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5월 4일 오전, 그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다시 방문해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 두 점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지인 몇 명에게 편지를 써 발송하고, 누이동생 권경숙 앞으로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잘 부탁한다" 는 취지의 유서와 30만 원을 남겼다.

오후 3시, 자신이 지은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자결이었다.


사후 — 영원의 시작

이중섭과 박수근처럼, 권진규의 진짜 명성도 사후에 시작됐다. 그가 시대착오적이라며 외면당했던 1960~70년대가 끝나고, 한국 미술계가 다시 전통과 영원성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그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 2004년 동선동 아틀리에 등록문화재 지정
  • 2009년 〈권진규전〉 —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무사시노 미술대학, 국립현대미술관 순회. 일본과 한국이 함께 기린 그의 50주기.
  • 2021년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이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
  •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노실(爐室)의 천사〉 (서울시립미술관) — 그의 시 〈예술적 산보 — 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에서 따온 제목. 입산(1947~1958) → 수행(1959~1968) → 피안(1969~1973) 세 시기로 나눈 회고전.

한국에서 만나는 권진규

  • 권진규 아틀리에 (서울 성북구 동선동) — 그가 직접 지은 작업실. 우물과 가마가 그대로 있다. 예약 방문 가능. 시민문화유산 제3호.
  • 서울시립미술관 — 2021년 기증 141점. 한국 최대 권진규 컬렉션
  • 고려대학교 박물관 — 〈마두〉, 〈가사를 두른 자소상〉. 그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작품들이 이곳에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 〈자소상〉(테라코타) 등 주요 작품 소장
  •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 무사시노 미술대학 자료관 / 도시마 야스마사 기념관 — 일본에 있는 그의 작품들

마치며 — 진실의 힘과 역사

권진규가 직접 쓴 시구 한 줄.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函數關係)는 역사(歷史)가 풀이한다."

그의 평생을 압축하는 말이다. 살아생전에는 시대에 외면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드러난다는 신념.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신념이 그의 자결을 막지는 못했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박수근(51세 사망)과 이중섭(41세 사망), 그리고 권진규(51세 자결) —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가장 비극적인 세 거장이 모두 5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났다. 가난, 전쟁, 분단, 시대와의 어긋남이 한 세대의 가장 빛나는 재능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착했다. 박수근의 거친 마티에르, 이중섭의 은박지, 권진규의 테라코타 — 모두 가장 보잘것없는 재료가 가장 영원한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같은 진실을 말한다.

다음에 권진규의 자소상 앞에 설 일이 있다면, 그 깊이 팬 눈자위를 잠깐 마주해보시길. 거기 시대와 어긋나면서도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간 한 장인의 침묵이 있다. 그것이 한국 조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자리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이한다."
— 권진규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 권진규, 1971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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