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환기, 점 하나에 별과 그리움을 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환기, 점 하나에 별과 그리움을 담다

들어가며

거대한 캔버스. 푸른빛이 화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색면이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인다 — 수만 개의 점. 각각 작은 사각형 안에 갇힌 점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한 점, 한 점, 한 점… 끝없이 반복되는 그 점들은 멀리서 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고요한 바다 위 빛의 어른거림처럼 빛난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 호는 수화(樹話).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 2024년 9월 기준으로 한국 작가 작품 경매가 상위 10위 안에 그의 작품만 10점이 들어 있다. 한국 미술 시장의 정점에 그가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평생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난, 그리고 점으로 채워졌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중 가장 시적인 자리에 그가 선다. 이배의 검정, 김창열의 물방울, 켈리의 색면, 톰블리의 휘갈긴 선 — 그 모든 단순함의 미학이 김환기의 안에서 한국적 서정으로 변주된다.


신안의 섬 소년

1913년 4월 3일,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安佐島) 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안좌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김환기 집안의 선대가 안창도와 기좌도를 간척사업으로 연결해 만든 이름의 섬이다.

섬 소년의 어린 시절은 두 가지 풍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다와 밤하늘. 동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던 푸른 바다, 그리고 별이 가득한 검푸른 밤. 후일 그가 평생 그린 환기 블루(Whanki Blue) — 그 깊고 차분한 푸른빛의 원형이 거기 있었다.

1931년, 19세의 김환기는 일본 도쿄로 밀항한다.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는 그를 막으려 선주들에게 미리 연락해두었지만, 그는 가까운 섬까지 헤엄쳐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결국 일본행이 허락됐다.


도쿄 — 아방가르드와의 만남

1933년 그는 니혼 대학교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한다. 1934년에는 일본 화단의 전위 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에 참여한다. 거기서 그는 유럽에서 돌아온 후지타 츠구하루 등의 지도를 받으며 입체주의, 구성주의, 미래파 등의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났다.

이 시기 그는 한국 화가로는 처음으로 순수 추상화를 그렸다. 〈론도〉(1938) 같은 기하학적 추상은 그의 가장 이른 추상 실험이었다. 1937년에는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일본 미술단체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 신사실파와 한국적 서정

1936년 졸업 후 귀국한 김환기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신사실파(新寫實派)' 를 결성한다. 한국 모더니즘의 출발점 중 하나였다.

이때부터 그의 작업은 점차 한국적 소재로 향한다. 그가 평생 사랑한 모티프들이 등장한다 — 백자 달항아리, 매화, 학, 산, 달, 항아리, 새. 특히 달항아리(白瓷大壺) 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흙과 유약의 오묘한 조화로 빚어진 조선 백자의 부드럽고 미묘한 빛깔과 단순한 형태가 현존하는 미적 가치 중 으뜸" 이라며, 그는 1940년대부터 달항아리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반(半)추상이었다. 사물은 알아볼 수 있지만, 면과 선과 색의 리듬으로 단순화되어 있었다. 〈산월(山月)〉, 〈영원의 노래〉 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파리 — 1956~1959년

1956년, 43세의 김환기는 파리로 떠난다. 3년간의 파리 체류는 결정적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서양 거장들의 진작을 직접 보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깊이 사유했다.

1957년 1월 그가 일기에 쓴 한 구절이 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詩) 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이 한 줄이 그의 평생 미학을 요약한다 — 시(詩)로서의 회화. 그림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노래여야 한다는 신념.

파리, 니스, 브뤼셀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열며 그는 국제 무대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뉴욕 — 1963~1974년, 점화의 탄생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던 그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명예상을 받는다. 이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그는 뉴욕으로 건너간다. 50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1974년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뉴욕에 정착한다. 한국에서 쌓은 모든 명성과 지위를 내려놓은 채. 매일 10시간 이상 그림에 매달리며, 가난과 외로움을 견뎠다.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후원이 그를 지탱했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위대한 변신이 일어난다. 한국적 소재의 반추상이 점차 사라지고, 화면 전체가 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1968년 1월 23일의 일기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날의 일기에 그의 다음 단계가 적혀 있다. 1968년경부터 그는 종이에, 신문지에, 한지 위에 점을 찍기 시작한다. 1970년에 이르러 그것이 전면 점화(全面點畵) 라는 그의 평생 대표 양식이 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1970년, 한국에 있던 그의 친구이자 시인 김광섭이 새로 발표한 시 〈저녁에〉를 김환기에게 보내왔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는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을 제목으로 한 거대한 점화를 그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 236×172cm의 거대한 캔버스에 무수한 푸른 점들이 가득 메워져 있다. 그해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작이 됐다.

수만 개의 점들 — 그것은 단순한 점이 아니었다. 서울을 생각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찍은 점들이었다. 그가 일기에 썼다.

"성북동 노시산방을 헐값에 넘겨 준 김용준, 결혼식 주례를 서 준 고희동, 부산 피난 시절 그림을 팔아 준 최순우, 김광섭…"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그리운 얼굴들이 푸른 점이 되어 화폭에 하나하나 찍혔다. 점 하나가 한 사람, 또는 한 별. 그래서 그의 점화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그리움의 지도였다.


점화의 작업 방식

김환기의 점화는 단순해 보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그는 먼저 화면 전체에 점을 찍은 후, 그 점 하나하나를 여러 번 둘러싸 가는 방식으로 색을 중첩시켰다. 점이 사각형 윤곽 안에 갇힌 듯한 그 모양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가로 2m × 세로 3m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약 4주가 걸렸고, 1년에 평균 10여 점을 그렸다.

색은 푸른빛이 주조였지만, 노랑·붉은빛·검정의 점화도 있다. 노란 점화 〈12-V-70 #172〉(1970), 붉은 점화 〈3-II-72 #220〉(1972), 푸른 점화 〈Universe〉(1971), 〈고요(Tranquillity) 5-IV-73 #310〉(1973) 등이 모두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차례로 갈아치웠다.


1974년 — 뉴욕에서의 죽음

1974년 7월 25일, 김환기는 뉴욕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디스크 수술 후의 합병증이었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수필가인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 이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후일 한국으로 돌아와 환기재단환기미술관(서울 종로구 부암동, 1992년 개관)을 세워 남편의 유산을 정리했다.


한국 미술 시장의 정점

김환기의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가 상위 10위를 모두 차지한다(2024년 9월 기준). 주요 기록들 —

  • 2015년 서울옥션 홍콩, 〈19-VII-71 #209〉, 47억 2,100만 원 (당시 한국 최고가)
  • 2016년 서울옥션 홍콩, 노란 점화 〈12-V-70 #172〉, 63억 2,626만 원
  • 2017년 케이옥션, 〈고요 5-IV-73 #310〉, 65억 5,000만 원
  • 2018년 서울옥션 홍콩, 붉은 점화 〈3-II-72 #220〉, 약 85억 3,000만 원
  • 2019년 크리스티 홍콩, 〈Universe 05-IV-71 #200〉, 약 132억 원 (현재 한국 작가 최고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비싼 그림들을 그리던 시절 그는 뉴욕에서 가난과 싸우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점을 찍었다.


한국에서 만나는 김환기

  • 환기미술관 (서울 종로구 부암동) — 부인 김향안이 1992년 개관한 그의 전용 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 주요 작품 소장
  • 김환기 고택 (전남 신안군 안좌도) — 1920년 건축,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
  • 호암미술관, 리움 등 주요 미술관에 그의 작품들이 분산 소장되어 있다.

마치며 — 별과 사람과 점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점의 미학들이 김환기에서 만난다. 이우환의 점은 동양적 사유의 점이었고, 톰블리의 휘갈긴 선은 시간의 점이었고, 켈리의 색면은 형태로서의 점이었다. 김환기의 점은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다 — 그리운 사람의 점, 별의 점, 고향의 점.

그가 평생 그린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는가. 그 답을 그는 모른다. 다만 캔버스 위에 점을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찍어갔을 뿐이다. 별이 그렇듯, 사람도 그렇게 흩어져 있고, 그렇게 빛난다.

다음에 김환기의 점화 앞에 설 일이 있다면, 캔버스 가까이 다가가 그 점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시길. 거기 한 사람씩의 그리움이 박혀 있다. 그것이 김환기가 그린 우주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 김환기, 1970년 1월 27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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