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물에 모든 것을 — 김창열, 평생을 물방울로 살아낸 화가
한 방울의 물에 모든 것을 — 김창열, 평생을 물방울로 살아낸 화가
들어가며
마대(麻袋)의 거친 표면 위에, 영롱한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도 그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림이기 때문이다.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幻影)일 뿐인데, 어찌 이토록 실재처럼 빛나는가. 물방울 안에는 천장의 빛이 비치고, 마대의 결이 굴절되어 보인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잠시 진짜를 본다고 믿는다.
김창열(金昌烈, 1929~2021) 은 50년이 넘도록 단 하나의 이미지 — 물방울 — 만을 그렸다. "왜 물방울이냐"는 질문에 그가 즐겨 한 답은 단순했다. "물방울이 그냥 물방울이지." 그러나 그 한 방울 안에는 한 사람이 견뎌낸 한국 현대사의 무게 전체가 들어 있다. 식민지, 분단, 전쟁, 친구의 죽음, 가족과의 이별, 이방의 가난. 모든 것을 물방울 안에 녹여 무(無)로 돌려보내는 일 — 그것이 그가 평생 한 일이었다.
평안남도 맹산의 소년 — 서예와 샘물의 기억
김창열은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대권과 어머니 안영금의 3남 3녀 중 장남. 그의 유년기를 결정지은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하나는 서예가였던 할아버지다. 어린 김창열은 할아버지 곁에서 붓글씨를 배웠다. 먹과 종이, 붓이 만나는 그 정적의 시간. 회화 이전에 글씨가 먼저였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 전체를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훗날 그가 평생 천자문과 물방울을 함께 그린 것은, 어쩌면 이 어린 시절의 손동작이 평생 그의 손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샘물이다. 그의 고향마을, 대동강 상류 산기슭에는 바위 구멍 세 곳에서 샘물이 솟구쳐 나와 일직선의 수로를 이루며 강으로 흘러들었다. 어린 김창열은 그 샘물 곁에서 놀고 자랐다. 맑고 차가운 물,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 평생 그를 따라다닌 이미지의 원형이 거기 있었다.
광성고보 시절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16세 즈음, 그는 홀로 월남한다. 분단이 굳어지기 전, 그러나 이미 격동이 시작된 시기. 가족과 헤어진 그는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이 새긴 상흔
서울에서 그는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1949년 검정고시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년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그에게 가장 깊은 흉터를 남겼다. 광성고보 동창 120여 명 중 절반이 죽었다. 그의 친구들이었다. 후일 그는 "내 작품의 출발은 그 친구들의 죽음"이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복학을 시도했지만 좌절한다. 스승 이쾌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의 등록은 거부되었다. 군 복무를 대신해 경찰직에 들어간 그는 부평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잠시 제주도에서도 경찰 생활을 했는데, 훗날 그가 제주를 "제2의 고향"이라 부르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앵포르멜 — 상처를 그리는 일
1957년, 김창열은 박서보, 하인두, 김서봉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 를 창립한다. 한국에 막 도착한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가장 격렬한 작업을 쏟아냈다.
이 시기의 대표작들에는 〈제사(祭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거친 표면, 어두운 색, 균열된 형태. 그것은 죽은 친구들을 위한 위령제였다. 그는 캔버스를 종이가 아니라 상처가 새겨진 살처럼 다뤘다. 총탄의 흔적, 탱크의 자국 같은 기호들이 화면을 채웠다. 후일 그가 50년간 매끈한 물방울을 그리게 되리라고는, 이 시기의 작품을 보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시기는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 상처를 새기던 손이, 결국 그 상처를 씻어내는 손이 되었다.
뉴욕의 악몽 (1965-1969)
1965년, 김창열은 김환기의 권유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4년은 그의 표현 그대로 "악몽" 이었다.
뉴욕은 이미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의 시대였다. 그의 앵포르멜은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졌고, 동양에서 온 무명 화가에게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관심, 가난, 외로움.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다시 자신의 화풍을 갈아엎어야 했다. 이 시기 그는 팝아트의 반복적 구성과 미니멀리즘의 단순한 색면에 영향을 받으며 〈제의(Rite)〉 시리즈, 그리고 〈현상(Phenomenon)〉 시리즈를 그렸다.
특히 〈현상〉 시리즈는 흥미롭다. 점액질의 액체가 화면 안쪽에서 밀려 나오는 듯한 형상 — 아직 물방울은 아니지만, 그것이 곧 도래하리라는 예감처럼 화면 위에 맺혀 있었다. 뉴욕은 그에게 가난을 줬지만, 동시에 물방울로 가는 길 위의 마지막 도약대이기도 했다.
파리의 마구간, 그리고 물방울의 탄생 (1971-1972)
1969년, 그는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정확히는 파리 남쪽 약 15km 떨어진 팔레조(Palaiseau) 의 한 낡은 마구간.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가 쓰던 그 마구간 작업실을 이어받아, 거기서 평생의 동반자가 될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 을 만난다.
그러나 가난은 파리에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새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린 캔버스를 재활용해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곤 했다.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을 떼기 좋게 만드는 작업. 1971년 어느 아침, 그 캔버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후일 회고했다. "그때 물방울을 만나고 존재의 충일감에 몸을 떨었다." 가난의 부산물로 우연히 생긴 한 방울의 물 — 그것이 한 화가의 인생을 가른 결정적 순간이었다. 1972년, 그는 캔버스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살롱 드 메, 그리고 '물방울 화가'의 탄생
운명은 빠르게 움직였다. 마구간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Alain Bosquet)의 눈에 띄었다. 그의 평론은 즉각적이었다. 보스케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보기 드문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 며 "우리를 일종의 자기 변형으로 끌고 간다" 고 썼다.
이 짧은 평문이 모든 것을 바꿨다. 다른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취재를 왔고, 1972년 그는 파리의 권위 있는 전위미술 전시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초대받는다. 출품작은 〈Event of Night〉(1972) —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만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1973년 놀 인터내셔널(Knoll International) 프랑스에서 열린 첫 프랑스 개인전은 결정타였다. '물방울 화가(Le peintre des gouttes d'eau)' 라는 호칭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신문 위의 물방울 — 1975년의 발견
1975년, 또 하나의 결정적 발견이 일어난다. 다락방을 정리하던 그는 묵은 신문 더미를 발견했다. 〈르 피가로(Le Figaro)〉 1면 위에, 그는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렸다. 인쇄된 활자와 영롱한 물방울 — 문자와 이미지의 만남이 처음으로 일어난 순간이었다.
이때 시작된 문자와 물방울의 조합은 1980년대 후반부터 더 완성된 형태로 발전한다. 신문 활자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천자문(千字文) 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곁에서 익힌 그 글자들. 화면을 천자문으로 가득 채우고, 그 위에 물방울을 그렸다. 글자의 획은 물방울에 굴절되어 비치고, 물방울은 글자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회귀(Recurrence)〉라는 제목이 이 시기 작품군에 붙는다.
회귀 —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린 시절의 붓글씨로, 고향의 샘물로, 그리고 삶의 근원으로.
물방울이 의미하는 것
평론가들은 그의 물방울에 수많은 해석을 내놓았다. 비극을 보고 흘린 눈물, 세상을 정화하는 물, 환상과 현실의 경계, 동양적 무(無)의 형상화, 미니멀리즘의 동양 버전, 극사실주의의 한국적 변주. 모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현학적 설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요약했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하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입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한 방울의 물 안에 그가 평생 짊어진 것 — 분단의 슬픔, 친구의 죽음, 이방의 가난, 정체성의 혼란 — 을 모두 녹여 보내려 한 것이다. 매일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곧 명상이자 기도였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정신적 놀이이며 명상 혹은 기도와 같은 행위" 라고 표현했다.
수십 년 동안 수만 개의 물방울을 그렸지만, 그중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린 아이가 구슬을 가지고 놀듯, 그는 평생 물방울의 시각적 효과를 연구하며 즐겼다고 아들 김시몽(고려대 불문과 교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명예관장)은 회고한다.
후기 — 색과 형태의 확장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창열은 새로운 시도를 한다. 채도가 낮은 배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Bell〉(2003)에서는 하늘색 바탕에 천자문을, 〈Yellow Earth〉(2003)에서는 강렬한 노랑을 캔버스에 들였다. 〈Meditation〉(2004)에서는 거대한 유리병을 천장에 매달아 실제 물을 담은 설치 작업까지 시도했다. 70대를 넘긴 거장이 여전히 새로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한국에서 만나는 김창열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2016년 개관)
김창열은 자신이 한때 경찰로 근무했던 제주도를 평생 사랑했다. 2016년 9월 24일, 제주시 한경면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작가가 직접 미술관 개관을 제안하고, 작품 약 200점을 기증했다. 한라산과 바람의 섬에 그의 물방울이 영구히 머무르게 된 것이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 작고 후 첫 대규모 정리
2021년 1월 5일, 김창열은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시신은 화장된 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서 수목장되었다. 평생을 떠돌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안긴 곳은 결국 그가 사랑한 섬의 한 그루 나무 아래였다.
그 4년 후인 2025년 8월 22일부터 12월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작가의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미공개 작품 31점을 포함해 120여 점이 출품된 이 전시는 그의 작품 세계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보여줬다.
- 상흔(傷痕) — 1950년대 앵포르멜 시기, 〈제사〉 시리즈를 비롯한 전쟁의 상처가 새겨진 초기작
- 현상(現象) — 뉴욕 시기의 실험, 물방울의 도래를 예감하는 〈현상〉 시리즈
- 물방울 — 1972년 파리에서 시작된 본격 물방울 작업, 50년의 궤적
- 회귀(回歸) — 천자문과 물방울이 만나는 후기 명상적 작업
전시 디자인은 루브르 랑스, 파리 그랑 팔레 등을 디자인해온 아드리앙 가르데르 스튜디오(Studio Adrien Gardère) 가 협업했다. 별책부록처럼 마련된 '무슈 구뜨, 김창열' 아카이브에서는 미공개 자료, 서신, 작가의 육성 영상까지 만날 수 있었다. 4개월간 이어진 이 전시는 한국 미술계에 김창열의 자리를 다시 굳건히 새기는 자리였다.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2022)
작가의 둘째 아들이자 사진작가인 김오안과 영화감독 브리지트 부이요(Brigitte Bouillot)가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부친의 마지막 모습과 일상, 작업실의 침묵, 그리고 평생 드러내지 않았던 트라우마와 눈물까지 담겨 있다. 김창열을 이해하는 가장 친밀한 텍스트 중 하나다.
마치며 — 한 방울에 담긴 한 평생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여섯 명의 작가를 만났다. 점과 선과 여백을 사유한 이우환, 검은 숯에 노동을 새긴 이배, 산업적 사물을 그저 거기 놓아둔 도널드 저드, 박물관에 정중한 편지를 쓴 갈라 포라스-김, 색과 빛으로 봄을 그린 데이비드 호크니, 그리고 한 방울의 물에 평생을 녹여낸 김창열.
이들 모두가 결국 도달하려 한 것은 비슷한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사물 앞에 서는 정직한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지점. 길은 달라도 도착하는 곳은 어딘가에서 만난다.
김창열의 길은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 그는 하나만을 그렸다. 50년 동안. 변주는 있지만 주제는 단 하나. 이런 종류의 외길을 걷는 화가는 흔치 않다. 도널드 저드가 상자에 평생을 바쳤듯, 이배가 숯에 모든 것을 걸었듯, 김창열은 물방울에 자신을 담갔다.
다음에 미술관에서 그의 물방울 앞에 설 일이 있다면, 잠시 멈춰 그것이 그저 물방울이 아님을 기억하시길. 거기에는 평안남도 맹산의 어린 아이가, 죽어간 친구들이, 뉴욕의 가난이, 파리의 마구간이,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무로 돌려보내려 한 한 사람의 일생이 담겨 있다.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 영원히 맺혀 있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요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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