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이 된 농부의 아들 — 이배의 검은 미학

 

들어가며

캔버스가 온통 검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그 검정은 결코 한 가지 색이 아니다. 깊은 우물 같은 검정, 갓 태운 나무에서 막 식어가는 검정, 빛을 흡수해 사라지는 검정 — 무수한 결을 가진 검정의 세계. 이것이 이배(李倍, 1956~ ) 의 작업이다.

세상은 그를 '숯의 작가(The Charcoal Artist)' 라 부른다. 30여 년 동안 한 가지 재료, 숯에 천착해 온 작가. 파리의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산 바비큐용 숯 한 봉지가 어떻게 한 예술가의 평생을 바꿔놓았을까. 그리고 그 검정은 왜 지금 세계 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색이 되었을까.

마침 지금(2026년 4월~12월)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그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이배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다.


농부의 아들, 화가가 되다

이배는 1956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도는 우리나라에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가 가장 큰 규모로 행해지는 곳이며, 후에 그의 작업 주재료인 숯을 굽는 가마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불과 나무, 검은 재 사이에 놓여 있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이 농부가 되어 가꿔온 과수원과 땅을 물려받기를 바랐다.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어긋남, 이 미안함은 평생 이배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70세가 된 지금도 그는 스스로를 "황무지에 선 농부" 라 부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1989년 그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약 40년에 가까운 긴 타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운명을 바꾼 숯 한 봉지 — 1990년, 파리

이배의 작업 인생을 가른 결정적 장면은 1990년 파리에서 일어났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 물감을 살 돈이 없었던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바비큐용 숯을 사 들고 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지 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숯이 단순히 저렴한 대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숯은 나무가 불에 타고 난 뒤 남은 단단한 본질 이었다. 부드러운 살은 다 사라지고 가장 밀도 높은 부분만 남은, '타고 남은 존재'. 동시에 그것은 동양에서 정화와 치유를 상징하는 물질이기도 했다. 새 집에 들이는 숯, 장 담글 때 띄우는 숯 — 우리 문화에서 숯은 부정을 막고 기운을 맑게 한다.

이배는 숯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와서 파리에 사는 한 동양인 화가가 표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서양의 유화 물감이 아니라, 자기 땅의 가마에서 구워낸 검은 덩어리였다.


주요 작품 시리즈

〈불로부터(Issu du feu)〉

이배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군이다. 캔버스에 숯 덩어리들을 직접 부착하거나, 숯을 갈아 만든 가루를 압착해 만든다. 가까이서 보면 표면의 결, 광택, 균열까지 살아 있다. 화면 전체가 검지만, 그 검정 속에서 미세한 빛이 스며 나온다.

2023년에는 이 시리즈의 거대 조각 버전이 뉴욕 맨해튼 한복판 록펠러센터에 세워져 화제가 됐다. 높이 6.5m, 줄로 묶인 거대한 숯덩어리 세 묶음. 화려한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선 검은 토템은 이배가 말한 "세계 곳곳의 재난과 전란을 치유하고 싶다" 는 염원의 형상이었다.

〈붓질(Brushstroke)〉

2000년대 이후 이배는 숯을 단지 '재료'에서 '동작'으로 확장한다. 압착한 숯가루로 만든 잉크를 거대한 붓에 묻혀 한 번의 호흡으로 그어낸다. 동양 서예의 단숨에 그어내는 일획(一劃), 그 정신이 현대적 회화로 부활한 셈이다. 수련처럼 반복된 몸의 기억이 한 번의 붓질에 응축된다.

〈미디엄(Medium)〉 시리즈 — 2004년 이후

숯가루와 밀랍(왁스)을 섞어 캔버스 위에 두께를 부여한 작업이다. 검정 안에서 또 다른 기호적 형태가 흐릿하게 떠오른다. 동양의 먹과 한지, 서예의 정신이 서양의 재료성과 만나 새로운 표면으로 재탄생한다.


이배의 검정 — 단색화와는 다른 검정

이배는 한국 단색화 거장들과 함께 자주 거론되지만, 그의 검정은 단색화의 검정과 결이 다르다. 박서보, 정상화로 대표되는 단색화의 단색은 형태와 색의 즐거움을 절제하고 정신의 정화를 추구하는 방향이라면, 이배의 검정은 모든 현실적 요소가 극도로 압축된 포화 상태다. 비움이 아니라 응축이다.

소멸의 끝에서 만난 가장 단단한 본질, 그것이 이배의 검정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정적이라기보다 어떤 응결된 에너지가 느껴진다.

국제적 위상

이배는 일찌감치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 2000년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
  • 2018년 —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훈장 기사장(Chevalier) 수훈
  • 2023년 — 뉴욕 록펠러센터 '한국문화예술 기념주간' 대표 작가로 6.5m 야외 조각 설치
  • 2024년 —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산 조르조 마조레 섬에서 대규모 개인전 개최
  • 페이스 갤러리, 페로탱, 조현갤러리 등 국내외 주요 갤러리 전속

2026년 1월 싱가포르 ART SG에서도 조현갤러리를 통해 〈Brushstroke〉 시리즈를 선보이며 동남아시아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박서보, 김환기 등과 더불어 해외 시장에서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이다.


지금 만나야 할 전시 — 〈En attendant : 기다리며〉, 뮤지엄 산

지금 이 순간 이배를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곳은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으로 한국 작가에게 헌정한 개인전이 바로 〈En attendant : 기다리며〉(2026년 4월 7일 ~ 12월 6일).

전시 제목 'En attendant'은 프랑스어로 '기다리는 동안'을 뜻한다. 이배에게 기다림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을 향해 에너지를 응축하는 능동적 시간이다. 나무가 가마 속에서 2주간 타고, 또 2주간 식어 비로소 숯이 되는 한 달의 시간 — 그 인고의 과정 자체가 그의 미학이다.

전시는 6개의 공간으로 펼쳐진다.

본관 입구 〈Issu du feu〉: 8m 높이, 7톤 무게의 거대한 숯 기둥. 입구를 떠받치는 처마 같기도, 청도 달집태우기의 환영 같기도 한 압도적 설치.

청조갤러리 로비 〈Brushstroke〉 16점: 2.27m × 1.82m 대형 종이에 숯 잉크로 그어낸 거대한 붓질들. 자연광에 따라 시시각각 인상이 바뀐다.

청조갤러리 1관 'White': 흰 공간 한가운데 천장에서 흰 종이가 늘어지고, 한 벽면에는 약 3만 5천 개의 스테이플러 침으로 붓질의 흔적을 새겼다. 물성 없는 공간에 물성을 박아 넣은 역설.

청조갤러리 2관 'Black': 캔버스에 다양하게 연마한 숯을 모자이크처럼 붙인 〈불로부터〉 6점. 옆으로 나란히 이어져 총 너비 10m가 넘는 검은 풍경.

청조갤러리 3관 〈Becoming〉: 9m 높이 스크린에 작가가 청도 논에서 거대한 붓을 휘두르는 영상이 흐르고, 그 앞에는 청도에서 직접 가져온 흙으로 만든 14m 길이의 논두렁. 전시 기간 동안 이 흙 위에서 식물이 자라고 시들기를 반복한다. 흙·신체·시간의 순환이 살아 움직이는 작품이다.

야외 '무의 공간': 10m 높이 브론즈 조각 〈붓질〉 6점이 치악산 능선과 안도 다다오 건축의 지붕에 호응하며 우뚝 솟아 있다. 조각이 풍경의 중심이 되기보다,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이 된다.

개막일 이배는 직접 맨발에 싸리비를 들고 흙바닥을 쓸어내는 '논 퍼포먼스' 를 선보였다. "빗자루로 흙을 쓰는 것은 근원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자, 마음을 쓸며 의지를 다지는 일"이라는 말과 함께. 70세의 작가가 고향의 흙 위에서 조용히 마음을 쓸어내리는 장면 — 그것이 이번 전시 전체의 정조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2019년 강원도 산불 현장을 찾았을 때, 무릎까지 빠지는 잿더미 속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농부는 땅을 일구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기도만 하게 된다" — 그는 그런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마치며 — 타고 남은 것들의 아름다움

이우환이 점과 선과 여백으로 동양의 사유를 길어 올렸다면, 이배는 검정 한 가지 색으로 그것을 한다. 둘 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보여주지만, 이배의 길은 더 직접적이고 더 신체적이다. 그는 숯을 굽고, 갈고, 짊어지고, 던지고, 쓰다듬는다. 작품은 사유의 결과물이라기보다 노동의 흔적이다. 농부가 땅에 남기는 발자국처럼.

70세의 이배는 여전히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부른다. 세계 정상의 작가가 된 지금도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자문하며 절망과 캄캄함 속에서 작업을 한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진짜 거장은 '내가 거장이다'라고 믿지 않는 사람인지 모른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쯤 강원도 원주에 갈 일이 있다면, 뮤지엄 산을 들러 그 검은 기둥과 거대한 붓질 앞에 서보길 권한다. 그 검정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을 태워 도달한 본질의 빛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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