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그리고 여백 — 이우환의 예술 세계

 

들어가며

한국 현대미술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이우환(李禹煥, 1936~ ). 캔버스 위에 점 하나, 선 하나를 그리는 행위로 세계 미술계의 정상에 오른 작가다. 단순함의 극치 같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처음에는 당혹스럽다. "이게 왜 명작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 단순함 뒤에는 동양 철학과 현대 미학이 절묘하게 만나는 깊은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동아시아 작가 중 한 사람인 이우환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자.


화가가 된 철학도

이우환은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가 불과 3개월 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 선택한 전공은 미술이 아닌 철학이었다. 니혼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이력은 훗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성 개념 — 이러한 동서양 철학의 교차점에서 그는 자신만의 미학을 빚어냈다. 화가이기 이전에 사유하는 자였고, 그 사유의 흔적이 곧 그의 붓질이 된 셈이다.


모노하(物派) 운동의 사상적 리더

1968년, 이우환은 일본의 조각가 세키네 노부오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을 계기로 그는 훗날 모노하(物派) 라고 불리게 될 미술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핵심 인물이 된다.

1969년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잡지 『미술수첩』의 평론 공모에 「사물에서 존재로」가 입선하면서 평론가로서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40여 편의 평론은 모노하 운동의 사상적 뼈대가 되었다.

모노하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사물(物, 모노) 그 자체를 예술 언어로 삼는다" 는 것이다. 돌, 철판, 유리, 나무 같은 재료를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배치함으로써,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공간을 작품의 본질로 삼는다. 이는 당시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통하면서도, 동양적 사유로 그것을 한 단계 넘어선 시도였다.


대표 작품 시리즈 — 반복 속의 차이

〈점으로부터(From Point)〉, 〈선으로부터(From Line)〉 — 1970년대

이우환의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두 시리즈다. 안료를 머금은 붓을 캔버스에 찍어 점을 그리거나, 옆으로 끌어 선을 긋는다. 그리고 이 행위를 붓의 물감이 다 닳을 때까지 반복한다. 처음에는 진하게, 점점 흐려지며, 마지막엔 거의 흔적만 남는다.

같은 행위의 반복이지만, 매 점과 매 선은 결코 같지 않다. 호흡이 다르고, 손의 떨림이 다르고, 물감의 양이 다르다. 반복 속에서 차이가 생성되고, 그 차이의 누적이 곧 시간의 흐름이며 무한의 경험이 된다.


〈조응(Correspondence)〉, 〈상응〉 — 1990년대 이후

후기로 갈수록 그의 캔버스에서는 점과 선의 수가 줄어든다. 한두 개의 붓 자국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터치와 논 터치가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내는 긴장감 — 그것이 이우환이 말하는 "여백 현상"이다.


〈관계항(Relatum)〉 시리즈 — 조각/설치

회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의 조각이다. 자연석과 철판을 단순히 마주 놓는 작업. 손을 대지 않은 돌과 산업이 만들어낸 철판이 한 공간에서 조용히 마주 본다. 무엇을 만들었다기보다 만남을 연출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여백의 미학 — "그리지 않은 것이 그린 것을 살린다"

이우환의 저서 『여백의 예술』(현대문학, 2002)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텍스트다. 그는 캔버스의 빈 공간을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려진 점과 선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활성화된 무대로 본다.

서양 회화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전통이라면, 이우환은 동양 산수화가 그러했듯 비워 둠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점에서 시작해 점으로 돌아간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결국 존재와 비존재, 만남과 헤어짐, 행위와 멈춤의 변증법이다.


세계가 인정한 거장

이우환의 국제적 위상은 화려한 개인전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다.

  •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2011) — 대규모 회고전
  • 베르사유 궁전 (2014) — 동양 작가로서 이례적인 대형 야외 전시
  • 에르미타주 미술관 (2016)
  • 퐁피두-메츠 센터 (2019)
  • 디아 비콘 — '이우환 코너' 상설 설치 (2019)

그의 작품은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 센터, 베를린 국립미술관,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세계 최정상 갤러리 중 하나인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 에 전속되어 있으며, 일본·파리·서울 세 곳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에서 이우환을 만나는 곳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2015년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에 문을 연 상설 전시 공간이다. 작가가 직접 건축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해,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가치가 있다. 2019년 BTS의 RM이 부산 공연 중 짬을 내어 이곳을 방문해 작품 〈바람〉 시리즈를 좋아한다며 방명록을 남긴 일화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

2010년 후쿠다케 미술재단이 개관한 곳으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세토 내해의 풍광 속에서 이우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 명소다.


곧 만나게 될 '이우환 미술관' (2029년 예정)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옆에 새로운 이우환 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설계한 건축가 최욱(원오원아키텍스)이 설계를 맡아 2029년 가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 컬렉션 입장에서는 매우 기다려지는 소식이다.


빛과 그림자 — 위작 논란

세계적 명성에는 그림자도 따랐다. 2016년경 불거진 위작 논란은 한국 미술계의 큰 사건이었다. 검찰의 과학 감정 결과 13점이 위작으로 판정되었고, 위조 화상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우환 본인은 일관되게 "위작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해 카탈로그 레조네 부재 문제와 작가의 진위 판정 권한이라는 더 큰 미술계의 화두를 남겼다. 현대 미술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 사건으로, 지금도 미해결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마치며 — 점 하나의 무게

처음 이우환의 작품을 마주하면 누구나 묻는다. "왜 점 하나가 그토록 비싼가?" 하지만 그의 작품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한 작가가 평생 다듬어 온 호흡, 사유, 신체의 흔적이 그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캔버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이다.

이우환은 90세를 앞둔 지금도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행위와 사유의 경계에서 그는 여전히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그 반복이 만들어낸 차이의 총합이 곧 우리 시대의 미술이며,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와 만나는 지점이다.

다음에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친다면, 잠시 멈춰 서서 점과 점 사이의 여백을 바라보길 권한다. 무언가가 거기서 조용히 호흡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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