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등지고 그리는 사람 — 이건용, 신체로 사유한 50년
캔버스를 등지고 그리는 사람 — 이건용, 신체로 사유한 50년
들어가며
화가가 캔버스 앞에 선다. 거기까진 평범하다. 그러나 그는 캔버스를 마주 보지 않는다. 캔버스를 등진 채 그 너머로 손만 뻗어, 보이지도 않는 화면 위에 선을 긋는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캔버스를 옆에 두고 옆구리로 손을 뻗어 그린다. 또 다른 작업에서는 캔버스 뒤로 돌아가 앞이 아니라 뒤에서 그린다.
왜 이렇게 그릴까? 그가 건넨 답은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이다. "화가는 자기 앞에 놓인 평면을 보고 그것을 옮겨 그립니다. 저는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신체가 닿는 만큼만 선을 긋습니다. 머리의 의식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건용(李健鏞, 1942~ ) — 한국 실험미술 1세대의 리더, 한국 아방가르드의 전위. 50년 동안 그는 눈이 아니라 몸으로 그렸다. 오랫동안 한국 미술계 주류로부터 외면당했지만, 80대에 이르러 뉴욕 구겐하임이 그를 불렀고, 세계 최정상 갤러리 페이스가 그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우환에 이어 페이스가 한국 작가와 맺은 두 번째 전속 계약이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는 동양적 사유, 검정의 노동, 산업적 사물, 박물관 비판, 색과 빛의 환희, 한 방울의 물에 모든 것을 녹인 화가까지 만났다. 이건용은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 회화 자체의 전제를 뒤집는 일, 그리고 그 뒤집음이 결국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이 되는 자리.
책에 둘러싸여 자란 소년
이건용은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결정지은 결정적 환경이 있었다 — 방대한 장서를 소유한 부친이다. 책으로 가득한 집에서 자라며 그는 일찍이 노장(老莊) 철학과 동양 사상을 만났다. 형식이 본질을 어떻게 가두는지, 무엇이 진짜 본질이고 무엇이 관습인지를 묻는 사유의 회로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안에 형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훗날 그가 후설의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깊이 빠져들고, 자신의 작업을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 이라 명명하게 된 것도 이 어린 시절의 토양 위에서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사유하는 사람이었다.
중학 시절부터 그는 이미 괴짜였다. 배재중 1학년 때 미술 교과서에 비평을 적었다가 담임에게 따귀를 50대 맞은 일화, 중3 때 예고에 가고 싶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퇴학 직전까지 갔던 일화.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일화 — 홍익대 미대 입시에서 데생 시험 때 다른 모든 응시자가 정면에서 그린 아폴로 조각상의 뒤통수를 그려서 합격한 사건이다. 당시 미대 학장이었던 김환기 화백이 이유를 묻자 그는 답했다. "저는 특별하게 그리고 싶어요."
이 한 마디가 이건용의 평생을 요약한다. 남들이 보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보는 일, 그것이 그의 평생 작업이 된다.
ST 그룹 — 한국 아방가르드의 출발점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1967)한 뒤, 이건용은 1969년 이화여대 입구에 '동양미술학원' 을 세웠다.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던 1960년대 말, 외국의 새로운 미술 흐름에 목말랐던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모여 함께 토론했다.
그리고 1969년, 그는 한국 미술사에 결정적인 단체를 결성한다 — ST(Space and Time, 공간-시간 조형미술학회). ST는 1981년 해체될 때까지 약 12년간 한국 아방가르드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이건용은 그 리더였다. 동시에 그는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
1969년~1970년대 초, 한국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절정기였다. 검열과 통제, 형식주의가 미술계를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ST의 젊은 작가들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어 입체, 해프닝, 이벤트, 영화, 퍼포먼스로 영역을 확장했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승택, 강국진 — 같은 시기의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당대 주류 미술계로부터 "이게 작품이냐" 며 외면당했다.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한국 현대미술의 두 줄기로 굳어지는 동안, 실험미술은 "잊혀진 50년" 을 보내야 했다.
〈신체항〉 — 1973년 파리 비엔날레의 충격
1973년, 이건용은 제8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다. 그가 출품한 작품 〈신체항(身體項)〉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 된다.
작품은 단순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뿌리째 뽑혀나간 거대한 나무의 밑동과 흙을 통째로 전시장에 옮겨놓았다. 높이 2.5미터, 흙이 그대로 묻어 있는 나무의 시신. 자연이 산업 개발의 폭력 앞에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설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건용 자신은 이를 단순한 환경 비판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가 후일 한 말이 더 본질적이다. "〈신체항〉은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품은 무엇인가를 물은 작품이었다." 갤러리에 옮겨진 한 그루의 죽은 나무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그 경계 자체를 묻는 일이 그의 평생 화두가 된다.
〈신체항〉은 현재 대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새로 제작되어 전시되었다. 202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에서도 이 작품이 현지에서 새로 제작되어 선보였다.
〈Bodyscape〉 — 1976년, 그리기의 9가지 방법
1976년,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회 ST전에서 이건용은 한국 현대미술사를 바꾸는 작업을 발표한다. 〈Bodyscape(신체의 풍경, 신체드로잉)〉, 그리고 그 회화 기법 9가지.
발상은 혁명적이었다. 화가는 보통 캔버스를 마주 보고 그린다. 그것이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이건용은 이 전제 자체를 의심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화면의 관계를 9가지로 재배치한다.
- 76-1: 화면 뒤에서 그리기 — 캔버스 뒤로 돌아가 화면을 보지 않고 손만 앞으로 뻗어 긋기
- 76-2: 화면 등지고 그리기 — 캔버스를 등진 채 양팔을 뒤로 뻗어 그리기
- 76-3: 화면 옆에서 그리기 — 옆구리로 손을 돌려 그리기
- 그 외 6가지가 더 이어진다 (총 9가지)
그가 한 일은 "앞에서 보고 그린다" 는 회화의 근원적 전제를 폐기한 것이다. 화가는 자신의 키, 양팔의 길이, 신체의 가용 범위라는 신체적 한계 안에서만 손을 뻗는다. 손이 닿는 만큼만,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선이 그어진다. 신체가 곧 측정기가 된다.
이 방식이 발표되었을 때 한국 사회는 박정희 유신 독재의 한가운데였다. 외부의 권력이 신체의 자유를 통제하는 시대. 이건용의 자기-제한적 작업은 그 통제에 대한 역설적 응답이기도 했다. 자기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자기 안에서 다시 가져오는 일, 외부 권력 대신 자신이 자신을 제한하는 자유 — 그것이 〈Bodyscape〉의 정치적 의미였다.
이 작업으로 그는 1979년 리스본 국제드로잉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변두리에 머물렀다.
〈달팽이 걸음〉 —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79년, 그는 또 하나의 전설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달팽이 걸음(Snail's Gallop / 달팽이의 질주)〉.
작업은 너무도 단순하다. 작가는 맨발로 쪼그려 앉는다. 한 손에는 분필이나 붓을 쥐고, 바닥에 좌우로 선을 그으며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그어진 선들은 그가 다시 발로 밟고 지나가면서 희미하게 지워진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흐린 선의 흔적만 마치 달팽이의 발자취처럼 남는다.
그리는 동시에 지운다. 만들어내는 동시에 사라지게 한다. 창조와 소멸이 한 행위 안에 동시에 일어난다. 회화의 가장 기본 단위인 '선 긋기'와 '신체의 이동'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이 모순적 풍경 — 그것이 〈달팽이 걸음〉이다.
작가는 후일 회고했다. "1979년 처음 이 작품을 만들었을 때는 선을 그리고 지운다는 회화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의미가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해석의 여지가 바뀌는 것 같다."
44년 후, 81세가 된 그는 2023년 10월 13~14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 퍼포먼스를 다시 선보였다. 5층 전시실 바닥에 깔린 10미터 길이의 붉은 목판 위에서, 80대 노작가가 쪼그린 자세로 묵묵히 선을 긋고 발로 지우며 전진했다. 100여 명의 관객이 침묵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지막 붓질 후 그가 일어서자 박수가 쏟아졌다. 한국 실험미술이 마침내 세계 미술의 중심에 닿은 순간이었다.
50년의 침묵 — 군산대학교의 시간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30여 년, 이건용의 시간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계가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양분되는 동안, 실험미술은 잊혀졌다. 그는 군산대학교 교수로 30여 년을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매일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갔다.
그림이 안 팔려 걱정한 적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내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다" 고도 했다. 누가 그리든 결과물은 비슷하게 나올 수 있는 작업, 그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미술의 본질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 그 자체라는 신념. 50년간 그는 그 신념을 흔들지 않았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다.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화가의 의도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재료와 시간이 만나 저절로 일어나는 사건(event) 으로서의 그림. 이것이 그의 핵심 사상 "이벤트-로지컬" 이다.
〈여기, 저기, 거기, 어디〉 — 언어와 신체의 만남
또 하나 그를 상징하는 퍼포먼스가 있다. 〈여기, 저기, 거기, 어디〉.
작업은 너무도 단순해서 어이없을 정도다. 바닥에 원을 하나 그린다. 백묵으로, 또는 막대기로. 그리고 작가는 그 원 안과 밖을 오가며 외친다.
- 원 바깥에 서서 원 안을 가리키며: "저기"
- 원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
- 원을 빠져나와 어깨 너머로 원을 가리키며: "거기"
-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
- 다시 나가서 어깨 너머로: "거기"
- 원의 선을 밟으며 빙글 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
선 하나가 그어지기 전에는 이름이 없던 공간이, 선 하나로 분리되며 논리가 생긴다. 같은 위치가 누가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여기'가 되었다 '저기'가 되었다 '거기'가 된다.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 한국어 지시대명사로 무대 위에서 펼쳐진 것이다. 언어와 신체와 공간이 만나 의미를 생성하는 그 메커니즘을 그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늦게 찾아온 영광 — 2010년대 후반 이후
50년의 침묵 후, 무엇이 바뀌었나. 2014년 단색화로 시작된 'K-Art' 열풍이 한국 현대미술의 뿌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단색화 위쪽이 아니라 그 옆과 그 이전을 봐야 한다는 인식. 그 시선이 닿은 자리에 한국 실험미술이 있었다.
- 2014년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이건용: 달팽이 걸음〉 회고전
- 2016년 — 갤러리 현대 〈이벤트 로지컬〉
- 2017~2019년 — 리안갤러리, 부산시립미술관 등 잇따른 개인전
- 2018년 — 중국 페이스 갤러리 개인전
- 2021년 — 갤러리현대 〈Bodyscape〉전 — 작품 완판
- 2022년 1월 — 홍콩 페이스 갤러리, 이건용 페이스 전속 계약 발표 (이우환 이후 한국 작가 두 번째)
- 2023년 5월~7월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 2023년 9월~2024년 1월 — 뉴욕 구겐하임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 2024년 2월~5월 — LA 해머 미술관 순회전
- 2024년 — 스위스 제네바 페이스 갤러리, 군산 이건용 현대미술관 개관
K옥션·서울옥션 등 미술 시장에서도 그의 작품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거래되는 블루칩이 되었다. 이건용 현상이라고 미술계는 부른다.
〈사유하는 몸〉 — 2026년, 50주년 기념전
가장 최근의 사건은 한 달 전이었다. 페이스 갤러리 서울은 이건용의 예술 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개인전 〈사유하는 몸〉을 2026년 2월 5일부터 3월 28일까지 개최했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신체와 논리' 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1층부터 3층까지 갤러리 전체를 할애한 전시였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작품으로서 공개된 자료들이 있었다. 1975년 〈동일면적〉, 〈실내측정〉, 〈손의 논리 3〉, 1977년 〈건빵 먹기〉, 〈화랑 속의 울타리〉 — 그동안 흩어져 있던 1970년대 중반 초기 이벤트의 영상 기록과 사진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 기간 중 작가가 직접 〈성냥 켜기(1975/2026)〉 등의 퍼포먼스를 두 차례 선보였다.
84세의 노작가가 50년 전의 작업을 다시 수행하는 광경. 그것은 단지 회고가 아니라, 그의 평소 신념의 증명이었다. 그의 작업은 과거의 사건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매 수행마다 다시 현재가 된다.
한국에서 이건용을 만나는 곳
군산 이건용 현대미술관 (2024년 개관)
그가 30여 년간 교편을 잡았던 군산에 자신의 이름을 단 미술관이 들어섰다. 평생의 작업과 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그의 ST 그룹 활동부터 최근까지를 망라한다.
다양한 미술관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그리고 영국 테이트 모던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마치며 — "신체는 지각자요 표현자"
이건용은 자신을 종종 "이벤트-로지컬 작가" 라고 부른다. 그가 만드는 것은 그림이라기보다 사건(event) 이다. 신체가 평면을 만나고, 손이 닿는 만큼 선이 그어지고, 발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는 —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공간의 작은 사건.
그래서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캔버스가 아니라 사진과 영상일지 모른다. 사건은 일회적이지만,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기록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활동 초기부터 그는 기록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여겼다. 〈Bodyscape〉의 매뉴얼은 워낙 잘 정리되어 있어, 누구든 그것을 따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이건용의 신체로 수행되었을 때에만, 그것은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누구든 자기 신체로 수행해도 의미를 갖는다. 이 두 진술이 동시에 참인 자리, 거기에 그의 미학이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 만난 작가들의 길을 다시 정리해본다. 이우환은 점과 선과 여백으로, 이배는 숯의 노동으로, 도널드 저드는 사물 자체로, 갈라 포라스-김은 박물관에 보내는 편지로, 호크니는 색과 빛으로, 김창열은 한 방울의 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건용은 그중 가장 급진적인 자리에 선다 — 그림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 작품이 아니라 사건이 미술이라는 입장.
그가 50년 동안 던진 질문은 한 가지였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체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매일 캔버스를 등지고 손을 뻗어 선을 긋는다. 그 행위 자체가 답이다.
다음에 미술관에서 그의 〈Bodyscape〉 앞에 설 일이 있다면, 그림 자체보다 그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을지를 상상해보시길. 한 사람이 캔버스를 등지고, 보이지 않는 표면을 향해 손을 뻗고, 자신의 팔길이 만큼만 선을 긋는 그 모습을. 그 보이지 않는 행위의 흔적이 거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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