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캔버스 삼은 사람, 백남준(Nam June Paik)
TV를 캔버스 삼은 사람, 백남준(Nam June Paik)
1984년 1월 1일, 전 세계 약 2,500만 명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뉴욕과 파리의 스튜디오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었고, 작곡가 존 케이지가 연주를 시작하는 동안 퐁피두 센터에서는 요제프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펼쳤다. 로리 앤더슨, 앨런 긴즈버그, 머스 커닝햄, 샬럿 무어먼, 이브 몽탕, 피터 가브리엘—한 시대의 거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KBS도 이 방송을 생중계했고, 한국의 안방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위성이 만드는 '전 지구적 생방송'을 목격했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을 연출한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다.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예언한 빅브라더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한국에서 태어난 한 예술가의 정면 반박이었다. "오웰, 당신은 좀 틀렸어요"—이것이 그의 인사였다.
서울에서 도쿄, 뮌헨, 뉴욕으로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홍콩과 일본으로 피난했다. 도쿄대학교에서 미학과 음악사를 공부하며 아방가르드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에 대한 논문으로 졸업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출발이 미술이 아니라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작곡가로서의 훈련은 그의 평생 작업에 '시간'과 '리듬'을 새겨 넣었다.
1956년 독일로 건너간 그는 슈토크하우젠이 이끌던 쾰른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서 활동하며 유럽 전위예술의 한복판에 섰다. 이때 만난 사람이 존 케이지였다. 케이지의 '우연성의 음악'은 그의 예술관을 뒤집었다. 이 시기 그는 플럭서스(Fluxus) 그룹에 합류해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바이올린을 머리 위로 들고 천천히 내리쳐 부수는 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통 예술의 권위를 그야말로 몸으로 부수는 시기였다.
비디오아트의 탄생
그리고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그는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전을 열어, 13대의 실험 TV를 공간에 배치했다. 오늘날 미술사가 비디오아트(Video Art)의 시작으로 기록하는 순간이다. 그 전까지 텔레비전은 가정의 가전제품이었지, 예술의 매체가 아니었다.
1964년 백남준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소니의 포타팩(Portapak)—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넣자마자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의 뉴욕 방문 장면을 촬영해 같은 날 저녁 '카페 오 고고(Café au Go Go)'에서 상영했다. 개인이 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공개하는 일련의 과정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그는 가장 먼저 증명한 사람이다.
이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의 협업으로 〈TV 첼로〉, 〈TV 브라(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같은 도발적이고 시적인 작품들이 탄생했다. TV 모니터를 악기처럼, 의상처럼, 신체의 연장처럼 다룬 이 작업들은 당대의 '점잖은' 예술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위성예술의 3부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혼자가 아니었다. 백남준은 이를 위성예술 3부작의 첫 편으로 기획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 뉴욕-파리-서울을 잇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반박. 〈바이 바이 키플링〉(1986) — "동양과 서양은 결코 만나지 못한다"는 키플링의 시구에 대한 반박. 뉴욕-도쿄-서울을 연결했다. 〈손에 손 잡고(Wrap Around the World)〉(1988) — 서울올림픽에 맞춰 10개국을 연결한 대규모 생중계.
이 세 편의 위성쇼는 인터넷 이전의 인터넷이었다. 그는 실제로 1993년 "우리에게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네트워크화된 세계에 대한 예언이었다. 글로벌한 실시간 소통, 국경을 가로지르는 라이브 스트리밍, 상호적 미디어 — 지금 우리가 매일 쓰는 모든 것을 그는 40년 전에 이미 실험했다.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
한국에서 백남준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다다익선〉(1988)이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1,003대의 TV 모니터를 18미터 높이의 탑처럼 쌓아 올린 거대 비디오 조형물이다. 대수는 개천절(10월 3일)을 상징한다.
제목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한자 성어이다. 정보화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자이자, 한국 전통 탑 구조와 현대 전자기기의 완벽한 결합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정신과 기술이 하나로 응축된 이 작품은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다. 2018년 노후화로 가동을 중단했다가 수년의 보존·복원 과정을 거쳐 최근 다시 불을 밝혔다.
2006년 이후, 여전히 작동 중인 유산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에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2008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해 그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관리하고, 후배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연구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제1회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예술상(Nam June Paik Prize)이라는 상으로도 남았다. 2018년 이 상의 첫 수상자는 트레버 팽글런(Trevor Paglen)이었다. 감시와 AI의 시대에 '기계의 시선'을 파헤치는 작가에게 이 상이 간 것은 의미심장하다. 텔레비전이라는 낡은 매체를 예술로 끌어올린 사람의 유산이, 이제는 AI와 감시 알고리즘을 파헤치는 작가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백남준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예술은 사기다(Art is fraud)." 자조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그 뒤에는 한 문장이 더 있다. 하지만 "사기를 쳐도 좋은 사기를 쳐야 한다"는 것. 관객을 속이되, 속인 뒤에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늘 그랬다. 망가진 TV 안에서 다른 세계를 꺼냈고, 위성을 악기 삼아 우주적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1,000대의 모니터로 동양의 탑을 쌓았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할 거라는 1984년의 공포에 맞서, 그는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연결하고 해방시킬 수도 있다고 증명했다.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된 지금, 우리는 이미 백남준이 꿈꿨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웰이 두려워했던 세상이기도 하다. 감시와 연결이 같은 기술에서 나온다는 역설—백남준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지금 다시 볼수록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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