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 손턴(Torey Thornton), 표면 위의 수수께끼
토리 손턴, 표면 위의 수수께끼
거대한 합판 위에 장난스러운 선 하나가 휘갈겨져 있다. 그 옆에는 네일 폴리시로 점이 찍혔고, 위로 스프레이 페인트가 흩뿌려졌으며, 다시 그 위에 아이의 낙서 같은 형체가 올라앉았다. 얼핏 미완의 실수처럼 보이지만, 제목을 읽는 순간 이미지가 다시 돌아온다. 「첫 번째, 엘비스가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상상한 후에」. 토리 손턴(Torey Thornton, 현재는 SoiL Thornton으로 활동)의 회화는 늘 이런 식이다. 이미지는 느슨하고 제목은 수다스럽고, 관객은 그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바로 그 길을 잃는 순간이, 이 작가가 설계한 작업의 시작점이다.
손턴(1990년 미국 출생)은 회화를 중심축으로 조각, 설치, 사진, 영상을 넘나드는 현대미술가다. 2012년 뉴욕 쿠퍼 유니언(The Cooper Union)에서 BFA를 마치자마자 이듬해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대 중반에 버팔로 AKG 미술관에서 첫 미술관 개인전 《서 베일(Sir Veil)》(2016)을 가졌다. 201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선정되며 동시대 회화의 현재를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 되었다. 현재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스스로 논바이너리임을 밝히고 대명사 they/them을 사용한다. 몇 해 전부터 작가명을 SoiL Thornton으로 바꾸었다.
합판과 철망과 농담 — 바탕을 고르는 작업
손턴의 회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탕이다. 그는 표준적인 캔버스를 거의 쓰지 않는다. 거친 종이, 판재가 촘촘히 붙은 울타리용 나무판, 어린이 놀이매트용 폴리에스터 매트, 주워 온 합판, 골판지. 이 잡다한 재료 위에 아크릴과 스프레이 페인트, 오일 파스텔, 샤피 마커, 연필, 심지어 네일 폴리시까지 올라간다. 바탕이 이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위에 놓이는 형상은 언제나 반쯤은 그 성격과 싸우고 반쯤은 그 성격에 기댄다.
그 위에 그려지는 형상들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계속 흔들린다. 긴 팔로 지구를 쓰다듬는 태양, 포도 접시로 돌진하는 파리, 장기 같기도 풍경 같기도 한 생물학적 덩어리. 필립 거스턴의 만화 같은 붓질, 라우셴버그의 컴바인, 재스퍼 존스의 국기 회화가 거의 동시에 떠오르지만 손턴은 어느 쪽에도 온전히 기대지 않는다. 평면은 한 장의 화면이라기보다, 여러 창이 포개진 컴퓨터 바탕화면에 가깝다.
제목이 곧 작품이다
손턴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제목을 지나치기는 어렵다. 「확실히 민병대 패션이 있지만, 자, 언제나 가정적인 것 같은 집중」, 「엄마를 위해 규칙을 좀 깨는 중」, 「긍정적 강화, 어떤 경계를 우리는 보는가, 슬림 짐이 슬림 제인보다 덜 성차별적으로 들리나」. SNS 피드의 반농담 문장 같은 이 제목들은 이미지 해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미로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래서 손턴의 회화를 읽는 일은 자주 수수께끼 풀기의 감각을 띤다. 정답은 없고 농담의 리듬만 남는다. 그러나 이 유머가 가벼운 쪽으로만 향하지는 않는다. 성별, 인종, 관습적 남성성, 예술 제도, 언어의 분류 체계가 제목 밑으로 꾸준히 흐른다. 이미지가 우스꽝스러워 보일수록 그 이미지가 건드리는 영역은 더 민감한 경우가 많다.
회화에서 설치로, 그리고 개입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 손턴의 작업은 회화의 사각형을 벗어난다. 쇠톱날 위에 거리에서 주운 돌들을 볼트로 고정한 원형 오브제, 철망과 플렉시글라스와 머그컵을 결합한 탑 같은 조각, 9피트짜리 금속 스터드에 붉고 흰 줄무늬를 입힌 깃대 조각.
2023년 빈 세세시온(Secession)의 개인전 《구혼자 고르기(Choosing Suitor)》는 이 확장의 결정적 지점이다. 관객은 갤러리 입구에서 약 26미터 길이의 거대한 인플래터블 조각 「허즈번드 체어」에 가로막힌다. 정면 출입이 봉쇄되어 관객은 후문으로 우회해야만 전시장에 들어설 수 있다. 2024년 이탈리아 레체 프로제토(Progetto)의 《후보자 심사 방법》에서는 공중화장실 소변기 칸막이의 브래킷으로 거대한 목재 칸막이를 제작했다. 관객은 그 칸막이가 반쯤 가려 놓은 사진들을 엿보듯 바라봐야 한다. 손턴에게 설치는 공간 장식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지나가는 궤적 자체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이름을 바꾸다 — SoiL Thornton으로서
최근 몇 년 사이 작가는 이름을 SoiL Thornton으로 바꾸었다. 단순한 필명 교체가 아니라, 작업 전반에서 점점 선명해진 주제 — 정체성 정치, 다양성, 생산성의 규범, 질서와 규제의 장치 — 와 겹쳐 읽히는 제스처다. 2025년 베를린 갤러리 노이(Galerie Neu)의 《더 레스트(The Rest)》에서 그는 'rest'가 품은 '휴식'과 '나머지'라는 두 의미를 엮어 생산성과 타자화의 문제를 시각화하고, 91분짜리 영상과 지인들에게 빌려 온 쿠션·러그로 관객이 실제로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이 시기 자주 호명되는 개념이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불투명성(opacity)'이다. 모든 것을 해독 가능한 투명성 안으로 밀어 넣지 않을 권리, 이해되지 않은 채로 존재할 권리. 손턴의 작업이 끝까지 농담의 표정과 수수께끼의 구조를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전히 해독되는 순간 작업은 또 하나의 분류표 아래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손턴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태도가 선명하게 남는다. 그는 작품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제목을 던지고, 바탕재를 바꾸고, 출입구를 막고, 관객을 눕힌다. 이미지는 언제나 반쯤 완성된 채로 남겨지고, 나머지 반은 관객의 몸과 해석에 맡겨진다. 회화가 평면 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결정의 연쇄 — 어떤 바탕, 어떤 재료, 어떤 제목, 어떤 동선 — 라는 사실을 이토록 집요하게 드러내는 세대의 작가는 드물다. 농담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관객에게, 손턴의 작업은 지금 동시대 회화에서 가장 믿을 만한 초대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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