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노 세갈(Tino Sehgal), 기록되지 않는 예술

 

티노 세갈(Tino Sehgal): 기록되지 않는 예술


전시장에 들어섰는데,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

리움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섰다고 상상해보자. 벽에 그림이 걸려 있지 않다. 좌대 위에 조각이 놓여 있지도 않다. 그런데 어디선가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와 당신에게 말을 건다. 혹은 두 명의 사람이 서로를 껴안은 채 조각처럼 움직이고 있다. 방을 나올 때, 당신은 방금 본 것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티노 세갈(Tino Sehgal, 1976~)의 국내 첫 개인전 풍경이다. 전시는 2026년 3월 3일 시작해 6월 28일까지 이어진다. 지난 25년간 현대미술의 경계를 확장해온 이 작가는, 흥미롭게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글은 "그게 예술이라고?" 싶은 분들을 위한 입문자용 안내서다.


1. 경제학자이자 안무가, 티노 세갈

티노 세갈은 1976년 런던에서 태어나 현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이력이 독특한데,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과 무용(dance)을 동시에 공부했다. 경제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는 시선과, 몸의 움직임을 조직하는 감각이 같이 자라난 셈이다. 이 배경을 기억해두면 그의 작업이 왜 지금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훨씬 이해하기 쉽다.

세갈은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을 시작으로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2010), 테이트 모던(런던), 팔레 드 도쿄(파리)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왔고, 201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 "구성된 상황"이라는 새로운 형식

세갈을 이해하는 열쇠는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회화도, 조각도, 영상도 만들지 않는다. 대신 공간·사람·움직임·말로 이루어진 하나의 '상황'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 두 무용수가 로댕·브랑쿠시·클림트의 유명한 '키스' 장면들을 천천히 재현하며 서로를 껴안는다.
  • 여섯 명의 공연자(세갈은 이들을 'interpreter'라고 부른다)가 살롱처럼 둘러앉아 정치·사회사상의 고전 명제에서 출발한 대화를 이어간다. 관람객도 참여할 수 있다.
  • 관람객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다가와 노래를 건네거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다.

세갈은 이 작업들을 '조각'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고정된 오브제는 없지만, 사람의 몸과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 형성되는 관계가 하나의 형식(form)을 이루기 때문이다.


3. 왜 사진도 영상도 허용하지 않는가

여기서 그의 가장 급진적인 선택이 등장한다. 세갈의 작업은 사진, 영상, 도록, 메모 등 어떤 물리적 기록도 허용하지 않는다. 작품이 미술관에 판매될 때조차 서면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공증인 앞에서 구두로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그의 출발점을 떠올려보자. 세갈이 보기에, 오늘날 경제는 끊임없이 물질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방식 위에 서 있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미술 시장은 오브제를 사고팔며 가치를 매기고, 미술관은 그것을 저장하고 분류한다.

세갈은 이 거대한 흐름에 작은 구멍을 내본다. 예술을 오브제가 아니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정의하면 어떻게 될까? 미술관은 그 경우 무엇을 소장하게 되는가? 시장은 무엇을 거래하게 되는가?

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은 그의 작업을 소장한다. 리움 역시 이번에 그의 대표작들을 소장품으로 확보했다. 그 소장의 실체는 오브제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는 권리' 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이것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에 던지는 개념적 실험이기도 하다.


4. 대표작 빠르게 훑어보기

〈Kiss〉(2002) — 두 무용수가 껴안은 채 미술사 속 유명한 키스 장면들을 연이어 재현한다. 로댕의 〈키스〉, 브랑쿠시의 〈키스〉, 클림트의 〈키스〉 같은 도상들이 한 몸의 움직임 안에서 연결된다. 리움 전시에서는 로댕의 실제 조각 옆에 놓여 시간의 경계를 넘는 대화를 만든다.

〈This Situation〉(2007) — 여섯 명의 interpreter가 살롱처럼 둘러앉아 대화한다. 각 발언은 정치·사회사상의 고전적 명제에서 출발하고, 관람객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들어갈 수 있다.

〈This you〉(2006) — 야외 공간에서 한 명의 interpreter가 관람객에게 다가와 짧은 노래를 건넨다. 세레나데 같기도, 예언 같기도 한 이 순간은 금세 사라지지만 오래 남는다. 리움에서는 새로 조성된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Gabriel Orozco Garden)〉 야외 데크에서 만날 수 있다.

〈This Progress〉(2010) —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복도를 따라 올라가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각기 다른 세대의 interpreter들이 차례로 관람객과 대화한다. '진보(progress)'라는 개념을 물리적 이동과 함께 체험하게 만든 야심작이다.


5. 리움 전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이번 리움 개인전에는 신작을 포함한 8점의 '구성된 상황'이 소개된다. 여기에 세갈이 직접 선별한 리움 소장 조각 26점 — 로댕, 자코메티, 앤터니 곰리, 솔 르윗, 권오상, 강서경 등 — 이 배치되어 그의 비물질 작업과 대화를 이룬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조각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세갈의 초기작 〈무언가 당신 코 앞에 나타나게 놔두는 대신 춤추는 브루스와 댄 그리고 다른 것들〉(2000)도 만날 수 있다.

전시장 입구 로비에서는 〈This is so contemporary~〉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야외 데크에 새로 조성된 〈가브리엘 오로즈코 정원〉에서는 4월 3일부터 〈This you〉가 공개되었다.


6. 사라지는 것이 남기는 것

우리는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폰이 모든 것을 찍고, 클라우드가 모든 것을 저장한다. 세갈의 작업은 정반대 쪽에 서 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만 존재하는 경험.

이 감각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낯섦 자체가 이 작업의 핵심이다.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 어쩌면 세갈의 작업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그것이다.

리움을 찾을 계획이 있다면, 이번에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가보시길 권한다. 아마 그 선택이 작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전시 정보

  • 전시명: 《티노 세갈》
  • 장소: 리움미술관 M2, 로비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 기간: 2026.3.3 – 2026.6.28
  • 촬영: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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