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물 속에 세계를 접어 넣는 사람, 양혜규(Haegue Yang)
일상의 사물 속에 세계를 접어 넣는 사람, 양혜규(Haegue Yang)
전시장에 들어서면, 공중에 거대한 블라인드 기둥들이 매달려 있다. 일상적인 베네치아 블라인드를 수백 겹 엮어 만든 구조물. 바람이 불면 얇은 슬랫들이 사락거리고, 조명이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투과시키며, 때로는 이 덩어리 전체가 회전한다. 가까이 가면 향이 풍기고, 뒤로 물러나면 거대한 추상 조각이 된다. 블라인드가 이토록 이상한 사물이었던가, 하는 질문과 함께 관람객은 양혜규의 세계로 이미 들어서 있다.
서울과 베를린, 두 도시를 오가며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건너가 1999년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30여 년간 서울과 베를린 두 도시를 오가며 작업해왔다. 이 이중 거주는 단순한 이력이 아니라 그의 작업 자체를 관통하는 조건이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접속해 있는 디아스포라적 감각—그것이 그의 설치 언어를 만들어냈다.
경력은 일찌감치 국제 무대에서 펼쳐졌다.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어 〈접힌 신문〉 등 대표작을 선보였고, 이후 뉴욕 MoMA(2019),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2018), 파리 퐁피두센터(2016),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2024)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잇달아 개인전을 열었다. **2018년 볼프강 한 상(Wolfgang Hahn Prize), 2022년 제13회 베네세상(Benesse Prize)**도 그의 이름 옆에 붙어 있다. 《아트리뷰(ArtReview)》가 선정한 Power 100 리스트에서 2024년 48위, 2025년에도 상위권을 유지하며, 한국 작가로는 가장 꾸준히 세계 미술계의 중심부를 지키는 인물이 되었다.
일상의 사물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
양혜규의 재료를 나열해보면 이상하리만치 평범하다. 베네치아 블라인드, 건조대, 전구, 벨소리, 방울, 인조 짚, 향기 발산기, 선풍기, 행거, 종이.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이 사물들이 그의 손에서 강력한 조각 언어로 변모한다.
그가 쓰는 전략은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잠복한 추상(incubated abstraction)". 작품 하나하나에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서사가 숨어 있지만,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관람객은 먼저 순수한 감각으로—빛, 색, 소리, 향으로—작품을 만난다. 그 후에야 그 뒤에 숨은 역사가 얇게 배어 나온다. 그래서 그의 설치는 언어 이전의 층위에서 먼저 작동한다.
핵심 작품 언어들
그의 대표 매체는 블라인드 설치이다. 2009년 베니스 이후 그의 작품은 수많은 진화를 거쳤다. 블라인드는 '보는 것'과 '가리는 것' 사이의 사물이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에 걸려 있고, 언제든 접히고 펼쳐진다. 그에게 블라인드는 디아스포라, 이주, 경계의 완벽한 은유다.
〈중간 유형(The Intermediates)〉. 인조 짚을 엮어 만든 조각들. 토속 신앙의 주술적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고대의 공예와 현대의 산업 소재가 기묘하게 접속하는 장면이다. 민속·샤머니즘·수공예가 그의 오랜 관심사임을 보여준다.
〈소리 나는 조각(Sonic Sculptures)〉. 수백 개의 방울로 덮인 인간 크기 조각. 관람객이 움직이면 함께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이를 그는 관객의 개입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퍼포먼스적 조각"**이라고 부른다.
〈황홀망(Mesmerizing Mesh)〉. 한국 무속의 '설위설경(設位設經)'—종이를 접고 오려 무구를 만드는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종이 작업. 최근 몇 년 그가 가장 집중해온 매체다. 평면이지만 입체적이고, 공예이지만 현대적이다.
한국에서의 기억들
양혜규의 이름이 한국 미술 애호가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2006년 인천 사동 30번지의 한 폐가에서 연 국내 첫 개인전은 "청소한다"와 "전기를 연결한다"는 두 행위만으로 시작된 전설적 프로젝트였다. 미미한 요소들이 폐가 곳곳에 놓여 있던 이 전시는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계에서 회자된다. 이후 리움미술관(201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2020)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로 한옥 공간을 포함한 여러 전시를 이어왔다.
2026년 봄, LA MOCA 《Star-Crossed Rendezvous》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다. 2026년 2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LA MOCA Grand Avenue에서 개인전 《Star-Crossed Rendezvous(엇갈린 만남)》이 열린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한국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1917~1995)과의 만남이다. 윤이상의 〈이중협주곡(Double Concerto)〉(1977)에 맞춰 움직이는 조명이 양혜규의 거대한 기하학적 조각들을 비춘다. 음악과 빛, 조각이 동시에 펼쳐지는 다감각적 경험. 2026년 3월 10일에는 MOCA와 LA 필하모닉이 공동으로 윤이상의 〈이중협주곡〉 특별 공연을 개최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독일에서 고초를 겪은 작곡가의 비극과 양혜규의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이 교차하는, 감정적으로도 정교하게 설계된 프로젝트다.
같은 시기, 미국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CAM)에서는 《Quasi-Heartland》가 2026년 2월까지 이어졌고, 취리히 Migros Museum für Gegenwartskunst에서는 스위스 첫 대규모 서베이《Leap Year》가 1월까지 열렸다. 한 계절에 세 대륙에서 그의 이름이 동시에 걸리는 풍경은, 그가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글을 마치며
양혜규의 작품 앞에 서면 관람객은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에 사로잡힌다. 분명 블라인드인데 블라인드가 아니고, 분명 공예인데 현대적이며, 분명 추상인데 그 안에 누군가의 삶이 접혀 있다는 감각. 그는 말한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세계화 이후의 예술, 디아스포라의 예술, 공예와 첨단이 뒤섞인 예술—이 모든 수식어가 그에게 붙지만, 결국 그의 작업은 한 가지를 한다. 일상의 가장 흔한 사물 안에 세계의 가장 복잡한 이야기를 접어 넣는 일. 블라인드 하나가 한 시대의 초상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오래전에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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