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 부재(不在)의 형태로 만든 애도

 

도리스 살세도: 부재(不在)의 형태로 만든 애도

전시장 바닥에 가늘고 긴 균열이 새겨져 있다. 길이는 167미터, 입구에서 시작해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깊고 넓어지다가, 끝에 이르면 어른의 팔이 들어갈 만큼 벌어진다. 2007년 가을, 테이트 모던 터빈 홀을 찾은 사람들은 그 균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았고, 누군가는 그 위에 발을 디디기를 망설였다.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의 《시볼레스(Shibboleth)》, 미술관이라는 이상화된 공간 한가운데에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역사를 새긴 작업이다. 전시 종료 후 균열은 봉합되었지만, 그 봉합선은 지금도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작가는 그것을 의도했다. 폭력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스 살세도(1958년 콜롬비아 보고타 출생)는 보고타의 호르헤 타데오 로사노 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뉴욕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고, 다시 보고타로 돌아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작업을 이어 왔다. 그녀의 작업은 콜롬비아 내전, 마약 카르텔의 폭력, 강제 실종, 정치 학살, 지중해를 건너다 죽은 이주민 같은 무겁고 구체적인 사건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는 시신도, 유혈도, 직접적인 재현도 없다. 대신 가구가 있고, 옷이 있고, 신발이 있다.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사물이 콘크리트로 굳어 있거나, 천천히 풀에 잠식되고 있거나, 벽 안에 봉인되어 있다. 그녀가 다루는 것은 폭력 자체가 아니라, 폭력이 떠난 자리에 남은 사물들이다.


신발 한 켤레의 무게 — 《아트라빌리아리오스(Atrabiliarios)》

1980년대 후반, 살세도는 콜롬비아 각지에서 실종된 여성들의 가족을 찾아다녔다.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단 하나, 사랑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신었던 신발이었다. 살세도는 그 신발들을 받아 미술관 벽에 작은 벽감(壁龕)을 파고 그 안에 한 켤레씩 넣은 뒤, 동물의 방광막으로 입구를 덮어 외과적으로 봉합했다. 관객은 반투명한 막 너머로 흐릿하게 신발의 윤곽을 본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부재(不在)의 형식. 작품 제목 'Atrabiliarios'는 깊은 슬픔, 멜랑콜리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 이 연작은 그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을 미리 제시했다. 폭력은 재현하지 않는다. 폭력이 남긴 빈자리를 만진다.


조용한 기도 — 《플레가리아 무다(Plegaria Muda)》

스페인어로 "조용한 기도"라는 뜻의 이 설치는 평범한 나무 탁자 수십 쌍으로 이루어진다. 두 개의 탁자가 한 쌍을 이루어, 위쪽 탁자는 뒤집힌 채 아래 탁자 위에 거꾸로 놓인다. 그 사이에는 흙이 깔려 있고, 며칠이 지나면 그 흙에서 가느다란 풀이 자라기 시작한다. 작품의 모티프는 콜롬비아 정부군이 무고한 농민 청년들을 죽인 뒤 게릴라 전사로 위장해 전과를 부풀린 '거짓 양성자(falsos positivos)' 사건이다. 탁자의 크기는 정확히 관(棺)의 크기에 맞춰져 있다. 죽음 위에서 풀이 자라고, 그 풀은 또다시 잘려 나간다. 그 천천한 시간을 작품은 미술관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온다. 추모의 형식이 침묵으로 가능해지는 자리, 그 자리를 그녀는 나무와 흙과 풀이라는 가장 평범한 재료로 만든다.


이름이 떠오르는 자리 —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지난 수십 년간 지중해와 대서양을 건너다 익사한 이주민들의 이름이 갤러리 바닥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살세도는 돌바닥에 미세한 물방울이 천천히 스며들도록 만든 특수 장치를 설계했고, 그 물방울들이 모여 누군가의 이름이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증발해 다시 자취를 감춘다. 그 아래에는 모래로 새긴 또 다른 이름들이 영구적으로 자리한다. 떠오르는 이름과 머무는 이름, 두 층위가 같은 바닥 위에서 겹쳐진다. '팔림프세스트'는 본래 양피지 위에 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쓴 고대의 문서를 가리킨다. 그녀의 바닥은 그 양피지가 된다. 통계 숫자로만 처리되었던 죽음들이 잠시 동안 개별적인 한 사람의 이름으로 되돌아온다.


글을 마치며

살세도의 작업은 거의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구를 콘크리트로 채우는 데 몇 년이 걸리고, 신발 한 켤레를 벽에 봉합하는 데 며칠이 걸리며, 풀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데 또 몇 주가 걸린다. 이 느린 시간이 그녀의 윤리이기도 하다. 폭력은 빠르고, 뉴스는 더 빠르다. 헤드라인은 다음 사건이 들어오면 곧 잊힌다. 살세도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빌려 그 속도를 거스른다. 그녀가 만드는 것은 기념물이 아니라 애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관객은 잠시 멈춰 서서, 신발 한 켤레의 무게나 바닥에 떠오르는 이름의 깜빡임을 응시한다. 그것이 그녀가 미술이 아직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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