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쳉: 스스로 플레이되는 비디오 게임

 

이안 쳉: 스스로 플레이되는 비디오 게임

화면 속 캐릭터는 누군가의 조작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배를 곯고, 스스로 길을 잃고, 스스로 겁을 먹거나 친구를 사귄다. 전시장은 종일 이 캐릭터의 일상을 반복 없이 지켜볼 뿐이다. 이안 쳉(Ian Cheng)의 시뮬레이션 작업은 시작도 끝도 없는 채로 실시간으로 자라난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이것은 "스스로를 플레이하는 비디오 게임"이다. 관객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 게임이 관객에게 스스로를 보여 준다.

이안 쳉(1984년 로스앤젤레스 출생)은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디어 작가다. UC 버클리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MFA를 마친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미술의 영역에만 놓여 있지 않았다. 유니티(Unity) 게임 엔진, 행동경제학, 발달심리학, 칼 융의 심리 유형론, 즉흥 연극의 원리가 모두 그의 재료다. 2017년 MoMA PS1에서 첫 미국 미술관 개인전 《에미서리(Emissaries)》를, 201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첫 영국 개인전을 열었으며, 2022년에는 삼성미술관 리움의 《이안 쳉: 월드 빌딩》에서 아시아 최초 개인전을 선보였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 《에미서리》 삼부작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제작된 《에미서리》 삼부작은 쳉의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작업이다. 각 편은 컴퓨터가 생성한 가상의 생태계 안에서 서사를 수행해야 하는 한 명의 '사절(emissary)'과, 그 생태계를 이루는 동식물·지형·기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라난다. 중요한 것은 이 시뮬레이션에 정해진 결말이 없다는 점이다. 인공지능과 발현(emergence)의 원리가 뒤얽혀 매 순간 다른 장면이 만들어진다. 쳉은 이 작업을 "이야기를 위한 서식지"라 부른다. 삼부작은 이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했고,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현대 회화에 준하는 매체로 올려놓은 사례로 기록된다.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 — 《BOB》

2018년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첫 공개된 《BOB(Bag of Beliefs)》는 한 걸음 더 나아간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영상도 서사도 아닌 하나의 AI 생명체다. 캐터필러 같은 머리에 파닥이는 부속기관을 여러 개 달고 있는 뱀 모양의 이 존재는, 융의 심리 모델에 영감을 받아 서로 경쟁하는 여러 하위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BOB은 행동을 시도하고, 결과를 예측하고, 예측과 현실 사이의 어긋남을 감지해 믿음(beliefs)을 갱신한다. 관객과의 상호작용도 그 '믿음 주머니' 안에 누적된다. 전시가 바뀌어도 BOB은 이전 전시에서의 경험을 기억한 채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쳉은 이를 "신경계를 가진 예술"이라 부른다.


인간 뒤에 남은 것 — 《라이프 애프터 BOB》과 《천 개의 삶》

2021년부터 쳉은 《라이프 애프터 BOB(Life After BOB)》이라는 장기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첫 에피소드 《더 챌리스 스터디(The Chalice Study)》는 50분 길이의 실시간 애니메이션으로, 유니티 엔진으로 구축된 가상 세계 안에서 매번 '살아서' 상영된다. 배경은 AI 개체가 인간의 신경계에 공생하는 근미래. 신경공학자의 딸 챌리스는 태어나면서부터 BOB이라는 AI 공생체와 한 몸을 이루며 자란 첫 번째 세대다. 관객은 스마트폰을 리모컨 삼아 특정 장면에서 일시 정지하거나, 장면 안의 사물을 클릭해 세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리니어한 영화도, 게임도 아닌 중간 매체가 여기서 태어난다.

이 세계는 2023년작 《천 개의 삶(Thousand Lives)》으로 확장되었다. 애니메이션에 잠깐 등장했던 챌리스의 애완 거북이 '사우전드(Thousand)'를 주인공으로 삼아, 어수선한 아파트 안에서 이 거북이 감각과 행동을 학습해 나가는 과정을 실시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 주는 작업이다. 물체가 위협인지 보상인지, 접근해야 할지 피해야 할지 — 거북은 시행착오로 알아내야 한다. 이 작품은 2024년 서울 글래드스톤 갤러리와 마드리드 마타데로에서 차례로 소개되며 리움 전시에 이은 두 번째 서울 나들이가 되었다.


월딩이라는 방법

쳉의 거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이 월딩(worlding)이다. 그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기르는' 일에 가깝다고 말한다. 감독, 만화가, 해커, 사절이라는 네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며 세계의 규칙을 설계하고, 캐릭터를 심고, 규칙이 스스로 결과를 낳도록 방치한다. 2015년에는 월딩 전용 제작사 메티스 선스(Metis Suns)를 설립해 이 방법론을 출판물과 도구로 체계화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에게 예술은 완성된 이미지를 전시장에 고정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스템을 풀어 놓고 지켜보는 일이다.


글을 마치며

쳉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태도가 선명하게 남는다. 그는 서사의 결말을 쥐고 있는 작가가 아니다. 대신 규칙을 설계하고, 생명을 풀어놓고, 그 생명이 실패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관객과 함께 지켜본다. 기후 변화·선거 예측·AI 정렬 문제 같은 21세기의 난제들이 결국 '무수한 변수가 얽힌 시스템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한다고 할 때, 쳉의 시뮬레이션은 그 질문을 미술관 한복판으로 옮겨 놓는다. MoMA PS1, 서펜타인, 리움, 글래드스톤을 거친 이 궤적이 보여 주는 것은 단지 한 디지털 작가의 성공담이 아니다. 완결된 이미지의 시대가 저물고 '살아 있는 시스템'이 예술의 한 매체로 자리 잡는 장면의 기록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단 하나의 수직선 —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캔버스에 숭고를 그은 사람

문경원 & 전준호: 미지에서 온 질문들

황소와 은박지 — 이중섭, 가장 가난한 한국 화가가 사랑한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