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지웠다 다시 그리는 역사

 

윌리엄 켄트리지: 지웠다 다시 그리는 역사

검은 종이 위에 한 남자의 얼굴이 목탄으로 그려진다. 카메라가 한 컷을 찍는다. 작가는 다시 작업대로 돌아가 방금 그린 얼굴의 일부를 지우개로 문지른다. 입의 모양이 달라진다. 카메라가 다시 한 컷을 찍는다. 또 지우고, 또 그리고, 또 한 컷을 찍는다. 이 과정이 수천 번 반복된다. 마침내 완성된 것은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한 편의 흑백 애니메이션이다. 그림이 살아 움직이며 풍경이 되고, 인물이 되고, 다시 풍경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종이 위에는 매번 지워진 자국, 그러니까 지나간 장면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영상에서 시간은 결코 지나가지 않는다. 다만 흐릿하게 겹쳐질 뿐이다.

윌리엄 켄트리지(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출생)는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서 정치범과 흑인 피해자들을 변호한 인권 변호사였다. 어린 시절 그가 본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사람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스며드는가 하는 풍경이었다.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미술과 연극으로 방향을 돌렸고, 파리에서 마임을 배워 보기도 했다. 회화, 드로잉, 애니메이션, 무대 연출, 조각, 오페라 등 그는 한 매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업의 한가운데에는 늘 같은 한 장면이 놓여 있다. 종이 위에 무엇을 그리고, 그 위에 무엇을 다시 지우는가 하는 장면.


지움의 흔적 — 〈드로잉으로 쓰는 영화〉 연작

1989년부터 켄트리지는 〈드로잉으로 쓰는 영화(Drawings for Projection)〉라는 제목 아래 일련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왔다. 등장인물은 주로 두 사람이다. 욕심 많은 백인 사업가 소호 엑슈타인,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남자 펠릭스 테이텔바움. 두 인물은 모두 작가 자신의 분신에 가깝다. 영화는 요하네스버그 외곽의 광산 지대를 배경으로, 자본의 욕망과 식민의 흔적, 사라진 노동자들의 풍경을 천천히 펼쳐 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영상의 매 순간을 지우개의 자국으로 채워 넣는다는 점이다. 그의 화면에서는 무언가가 사라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종이 위에는 늘 이전 장면의 흐릿한 그림자가 남는다. 그 그림자는 곧 역사의 형식이기도 하다. 잊혔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다음 장면 위에 그대로 얹혀 있다는 것이다. 


행렬의 그림자 — 〈모어 스위틀리 플레이 더 댄스(More Sweetly Play the Dance)〉

2015년 작 이 영상 설치는 약 40미터 길이의 파노라마 화면 위에서 펼쳐진다. 화면 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끝없이 행진해 간다. 어떤 이는 십자가를 들고, 어떤 이는 침대를 끌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끌고 간다. 음악은 남아프리카 브라스 밴드의 흥겨운 리듬, 그러나 화면 속 행렬은 어딘가 장례 행렬을 닮아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이 "모든 행진 — 난민의 행렬, 종교 행렬, 정치 시위, 장례 행렬 — 의 보편적 형상"을 그리려 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흥과 슬픔이,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보폭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다. 그가 그리는 행진은 어디로도 도착하지 않는다. 다만 끝없이 지나갈 뿐이다.


시간의 거부 —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

2012년 카셀 도쿠멘타에서 처음 선보인 이 30분짜리 영상 설치는 다섯 개의 화면, 메트로놈, 거대한 풀무 모양의 기계 조각으로 구성된다. 작품의 출발점은 19세기 식민 시대에 유럽 표준시가 어떻게 아프리카로 옮겨졌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발신하면, 식민지의 모든 시계는 그 시간에 맞춰 다시 세팅되었다. 시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한 사회를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켄트리지는 이 역사 위에 자신의 드로잉, 안무, 음악을 겹쳐 놓는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정해진 박자에서 끊임없이 빗겨 나가고, 메트로놈은 어긋나며, 풀무 기계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누군가가 정해 준 시간을 거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 한 가지에 가깝다.


글을 마치며

켄트리지의 작업실에서는 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사진을 찍고, 그 그림의 일부를 지운다. 다시 그리고, 다시 찍는다. 이 단순한 동작이 그의 평생의 작업 방식이다. 이 동작이 단순한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기록은 다음 시대에 의해 덮이고, 덮인 자리에는 늘 지우다 만 흔적이 남는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이 종이 위에서 조용히 흐려질 때, 우리는 어쩐지 우리 자신의 시대도 그렇게 누군가의 종이 위에서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의 영상이 끝나도 화면에는 늘 잔상이 남는다. 그것은 켄트리지가 지우개로 만든, 가장 정직한 형식의 역사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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