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내 안에 있다 — 유영국, 평생 산을 사모한 화가

 

산은 내 안에 있다 — 유영국, 평생 산을 사모한 화가

들어가며

거대한 캔버스. 강렬한 빨강과 파랑, 노랑이 부딪친다. 삼각형, 원, 직선이 교차하며 화면을 분할한다.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이 있다. 봉우리의 윤곽, 능선, 계곡, 떠오르는 해. 자연이 가장 단순한 기하학으로 환원되어 거기 서 있다.

유영국(劉永國, 1916~2002).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선구자. 김환기와 함께 한국 모더니즘의 두 기둥. 김환기가 그리움의 점을 그렸다면, 유영국은 평생 을 그렸다. 그것도 산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점·선·면·색의 추상 형태로 그렸다. 그가 말했다 —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번 시리즈에서 만난 켈리가 형태를 자연에서 발견했다면, 유영국은 자신의 고향 산천을 60년간 추상으로 변주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 없지만,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울진의 산천

1916년 4월 7일, 유영국은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적이 있다. "내가 자란 울진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었다. 동해 바다, 그리고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산. 그 풍경이 내 평생을 따라다녔다."

울진의 산. 동해의 바다. 붉은 일몰과 푸른 새벽. 한국의 자연이 가장 강렬한 형태로 나타나는 곳에서 자란 소년이 평생 그릴 주제를 거기서 얻었다. 고향이 평생의 모티프가 된 사례 중 가장 정직한 경우가 그였다.


도쿄 — 1935년, 가장 전위적인 자리에서

1935년, 19세의 유영국은 일본으로 향해 도쿄 문화학원(文化學院) 에 입학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의 이 학교에서 그는 한국 화가로서는 가장 처음부터 추상을 시도했다.

이 시기 그가 어울린 사람들 —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한국 근대미술의 별들이 도쿄에서 같은 시기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작업을 보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자신의 길을 찾았다.

1938년, 22세의 유영국은 일본의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會) 의 제2회 전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다. 한국 화가가 일본 전위 미술의 정점에서 인정받은 첫 사례 중 하나였다.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같은 일본 추상미술의 리더들과도 교류했다.

이 시기 유영국의 작품은 순수한 기하학적 추상 — 점, 선, 면, 원, 삼각형의 구성. 김환기가 한국적 소재의 반추상으로 향했다면, 유영국은 출발부터 완전한 추상으로 갔다.


신사실파와 광복 후의 한국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유영국은 김환기, 이규상 등과 함께 '신사실파(新事實派)' 를 결성한다(1947년).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출발점 중 하나. 이후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연합 등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한국 추상미술의 길을 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 한국에 돌아온 그가 잠시 미술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그는 가족 부양을 위해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하고 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림을 떠난 적이 없었다. 매일 시간을 내어 작업했고, 1955년경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화단에 복귀한다.


1964년 — 첫 개인전, 그리고 산의 시대

1964년, 48세의 유영국은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무려 15점의 신작이 출품됐다. 그 전까지는 주로 그룹전으로 활동했지만, 이때부터 그는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났다" 고 선언하며 자신의 길을 갔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산을 정면으로 마주한 거대한 화면이었다. 거대한 산수를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법의 시점, 사계절의 자연이 큰 화면에 펼쳐졌다. 관객들이 "마치 깊은 숲 속에 빨려들어 갈 것 같다" 고 느꼈다는 그 작품들이다.

이후 그는 평생 을 그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은 대부분 두 가지다 — 〈작품(Work)〉 또는 〈산(Mountain)〉.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산의 추상 — 색과 형태로 본 자연

유영국의 산은 사실적인 산이 아니다. 그가 직접 한 말이 가장 명확하다.

"추상은 말이 없다. 설명도 필요 없다. 보는 대로 이해하면 된다. 내가 그린 건 구체적인 대상의 자연이 아니라 선과 면, 색채들로 구성된 추상 형태의 자연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것들 —

  • 삼각형 — 봉우리
  • 곡선 — 능선
  • — 해, 달
  • 수직선 — 폭포, 나무
  • 색면 분할 — 계절, 시간, 빛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을 기반으로, 그는 한국적 정서가 깃든 보라, 짙은 초록, 깊은 군청을 자유자재로 변주했다. 같은 빨강 안에서도 밝은 빨강, 진한 빨강, 탁한 빨강, 깊이감 있는 빨강 — 미묘한 차이를 통해 그는 산이 가진 다양한 시간과 감정을 표현했다.

흥미롭게도 그의 색은 종종 한국 전통 오방색(五方色) 을 떠올리게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평생을 살아온 한국적 정서가 색의 선택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결과였다.


작품 속의 철학

유영국이 남긴 가장 인상적인 글 중 하나가 있다.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가 베고 잤을지도 모르는 산가 여인숙의 헌 베개같이 축소 해석되어 한밤 내내 친근한 대화를 오가게 한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 한 문단이 그의 평생 작업을 압축한다. 산은 객체가 아니라 내면화된 풍경. 그래서 그의 산은 매번 다르다. 같은 산이지만 매번 새로 발견되는 산. 그것이 60년간 변주된 그의 평생 화두였다.


후기 — 1980~90년대의 단순화

1980년대 이후 유영국의 작품은 더욱 단순화된다. 형태는 더 명확하고 견고해지고, 색은 더 깊어졌다. 암녹색조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 — 평론가들이 그의 후기 화면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산속 깊은 어둠 속에서 햇살 한 줄기가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긴장감.

심장 질환과 뇌출혈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에도 그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70대, 80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화면은 젊은 화가들도 따라가기 힘든 강렬함을 잃지 않았다.


2002년 — 마지막

2002년 11월 11일, 유영국은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평생 약 400여 점의 유화를 남겼다. 김환기가 점화로 도달한 자리를, 그는 산의 색면 분할로 도달했다. 두 친구는 다른 길을 갔지만 같은 정상에 닿았다.


한국에서 만나는 유영국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서울) — 그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관리
  • 국립현대미술관 — 〈산(남)〉(1968) 등 주요 작품 소장
  • 2024년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근현대미술 흐름〉 등 주요 미술관 전시에 그의 산이 빠지지 않는다
  • 삼성미술관 리움, 호암미술관, 그리고 여러 사립 미술관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술시장에서 김환기 다음으로 가장 신뢰받는 한국 1세대 작가의 자리가 그에게 있다. 그러나 김환기처럼 폭발적인 가격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 그것이 오히려 그의 작품을 조용히 사랑하는 컬렉터들에게 의미 있는 매력이 된다.


마치며 — 산을 닮은 사람

유영국과 김환기는 같은 시대, 같은 도시(도쿄)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의 평생은 다른 길을 갔다. 김환기는 한국 → 파리 → 뉴욕으로 이어지는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았고, 유영국은 거의 평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김환기가 그린 점은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들이었고, 유영국이 그린 산은 가까이 있는 정직한 자연이었다.

이 시리즈에서 만난 작가들 가운데, 유영국은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자리에 선다. 평생을 한 가지 — 산 — 에 매달린 그의 신념은, 켈리의 색면, 저드의 상자, 김창열의 물방울처럼 단순함의 깊이를 보여준다.

다음에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의 작품을 만날 일이 있다면, 유영국의 산 앞에서 잠깐 멈춰보시길. 그 단순한 색면들 안에 한 화가가 평생 들여다본 한국의 산이 살아 있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 유영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