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여인과 뱀 — 천경자, 슬픈 전설을 화폭에 새긴 사람
들어가며
화면 가득 한 여인이 정면을 응시한다. 머리에는 활짝 핀 꽃이 꽂혀 있다. 능소화일까, 동백일까. 눈동자는 깊고 슬프다. 그 눈은 보는 사람을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화려한 색채 — 청록, 진홍, 황금. 그러나 그 화려함 안에 어쩐지 *씁쓸한 한(恨)*이 어린다. 여인의 옆에는 때로 뱀이 있고, 새가 있고, 꽃잎이 흩어진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본명은 천옥자(千玉子). 한국 채색화의 선구자, 꽃과 여인의 화가. 평생 약 1,500여 점의 작품과 10권 이상의 수필집을 남긴 사람.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여성 화가가 극히 드물던 시대에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거의 유일한 거장. 그러나 그녀의 평생은 *영광과 한(恨)*이 함께 흘렀다. 그녀가 자주 한 말 —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박수근이 이름 없는 한국인의 일상을, 이중섭이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면, 천경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닮은 여인들을 그렸다. 그녀의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여인은 모델이 누구든 결국 그녀 자신을 닮았다.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깊은 의미의 자화상화가 — 그것이 천경자였다.
고흥의 외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1924년 11월 11일,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어머니 박운아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천옥자.
흥미로운 가족사 —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초기에 딸(어머니 박운아)에게 남장을 시켜 서당에 보낼 만큼 사상이 깨어 있었던 분이었다. 그 외할아버지가 무남독녀 외동딸의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했다. 매일 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어린 옥자는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삼국지〉, 〈수호전〉**을 들으며 자랐다.
이 어린 시절의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이야기들이 그녀의 평생 작업을 결정짓는다. 후일 그녀가 그린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화면 — 신화와 꽃과 여인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그 세계 — 의 씨앗이 외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심어졌다.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 채색화의 시작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운 그녀는, 1941년 17세에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도쿄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스스로 본명 옥자를 버리고 '경자(鏡子)' 라는 이름을 지어 쓴다. 거울 같은 사람. 자기를 비추는 자.
도쿄에서 그녀가 배운 것은 일본화 고등과의 사실적 데생법과 채색법. 일본 화풍의 정교한 채색 기법이었다. 1943년,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열었다.
1951년 〈생태〉 — 35마리의 뱀
천경자의 본격적 데뷔는 1952년 부산 개인전에서 발표한 〈생태(生態)〉 였다. 35마리의 뱀이 한데 뒤엉킨 그림.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소문이 화단에 퍼졌다. 1950년대 한국 화단이 풍경, 인물, 정물 같은 점잖은 소재에 머물러 있을 때, 그녀는 가장 도발적이고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로 등장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배경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녀의 여동생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삶의 고난이 극에 달했을 때, 그녀는 뱀을 보며 생의 충동을 느꼈다. 죽음과 생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뱀들의 꿈틀거림. 그것이 그녀의 첫 본격 작품이 되었다.
이 강렬한 데뷔로 그녀는 단숨에 화단의 스타가 되었다. 1954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됐고,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정(情)〉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30대 초반에 한국 화단의 정상에 오른 셈이다.
꽃과 여인 — 그녀의 평생 화두
1960년대 이후 그녀의 작업은 꽃과 여인으로 좁혀진다. "꽃과 여인의 화가" 라는 별칭이 붙었다. 한 평론가는 이런 평을 했다 —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이지만, 꿈과 한(恨)을 일관된 주제로 삼은 그녀의 표현은 오히려 대범하고 독특하다.
그녀의 화면에 등장하는 여인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화상이 아님에도 여인들이 화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 심지어 외국인 모델을 그린 작품에서도 그 여인은 천경자를 닮아 있다. 의도였다. 그녀가 평생 그린 모든 여인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분신이었다.
특유의 고독하고 몽환적이며 애틋한 눈빛. 머리에 꽂힌 꽃. 그 옆에 있는 뱀이나 새. 화려한 색채 안의 깊은 한(恨). 이것이 천경자식 여인의 모든 어휘다.
1972년 베트남 종군화가 — 유일한 여성
흥미로운 사건. 1972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 정부는 김기창, 박서보, 천경자 등 화가 1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20일간 보내 한국군의 활약을 기록하게 했다. 천경자는 그 1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다른 화가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그린 사이, 천경자가 그린 것은 꽃이었다. 우거진 밀림과 열대꽃의 아름다움. 284×185cm의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 병사와 전차들 사이로 꽃이 뿜어낸 듯한 붉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전쟁 한가운데서도 그녀가 본 것은 꽃의 생명력이었다. 가장 천경자다운 응답이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전쟁기념관 수장고에 있다가, 2024년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30년의 세계 여행 — 이국적 풍취
1969년부터 약 30년간 그녀는 남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를 두루 여행했다. 한국 여성 화가가 그 시대에 그토록 자유롭게 세계를 떠돌았다는 것 자체가 시대를 앞선 행보였다.
이국 여행의 흔적들은 그녀의 작품에 짙게 스며들었다. 〈카이로 테베 기행〉(1984), 〈사군도〉(1969), 〈황금의 비〉(1982) — 이집트, 그리스 신화, 아프리카, 멕시코의 정서가 그녀의 채색화에 녹아들었다. 〈황금의 비〉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황금 비로 변신해 다나에에게 접근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들
천경자가 평생 남긴 작품 중 가장 널리 사랑받는 것들 —
- 〈생태〉(1951) — 35마리 뱀의 데뷔작
- 〈정(情)〉(1955) — 대통령상 수상작
- 〈사군도〉(1969)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 22세의 자신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 "그림 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고,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에요" 라고 그녀가 직접 설명한 작품.
- 〈초원 II〉(1978) — 2009년 K옥션에서 12억 원에 낙찰. 그녀의 작품 중 최고가 기록.
- 〈미도파의 초상〉(1981) — 둘째 딸 김정희에게 붙여준 별명 미도파
- 〈황금의 비〉(1982)
- 〈청혼〉(1989), 〈여인〉(1990) — 큰딸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들
작품 제목들에서도 보이듯, 그녀의 그림은 자기 가족, 자기 인생, 자기 슬픔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자리에 닿는 자리.
작가이자 수필가 — 글쓰는 화가
천경자는 그림만큼이나 글에도 재능이 있었다. 1955년 첫 수필집 〈여인소묘〉 를 시작으로 평생 단행본 15권,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을 발표했다.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한 자전적 글들은 1978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2006년 새로 편집되어 재출간).
남태평양 여행을 다니면서 데셍 삽화와 함께 출판한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도 당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작가 한말숙, 박경리 등 문인들과도 깊은 교류를 나눴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그림과 글이 하나의 인격으로 합쳐진 거의 유일한 사례가 그녀였다.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 평생의 상처
천경자 노년의 가장 큰 비극이 일어났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녀의 〈미인도〉 를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으로 복제 판매하던 중, 작가 본인이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위작이다" 라고 선언한 사건.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 감정을 거쳐 진품이라고 판정했다. 작가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항변 —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남들이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느냐" — 에 돌아온 것은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어미" 라는 모욕이었다.
당시 67세였던 그녀는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4개월 후 잠시 돌아왔지만, 평생 이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한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은 사건 — 그것이 한국 미술사의 가장 부끄러운 장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95년 호암갤러리 회고전 — 8만 명의 줄
1995년, 72세의 천경자는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전시. 8만 명의 관람객이 줄을 서서 그녀의 작품을 보았다.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회고전 중 하나였다.
1998년 — 93점 기증, 그리고 미국으로
1998년, 그녀는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라는 말과 함께 1940~1990년대에 걸쳐 제작된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 그리고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다. 향년 74세였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공개적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2003년 뇌일혈로 거동과 발화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작품 활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2015년 — 사망, 그리고 침묵
2015년 8월 6일, 천경자는 뉴욕에서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 그녀의 죽음을 가족이 약 두 달간 비밀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2015년 10월 22일에야 그녀의 별세 소식을 알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자녀들의 결정이었다.
평생 화려했던 한 화가의 마지막은 침묵이었다. 마치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그녀가 평생 견뎌야 했던 침묵의 연장처럼.
시장이 말하는 천경자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한국 경매시장 낙찰 총액 상위 화가 20명을 분석한 결과, 천경자의 호당 가격이 현존 작가 중 최고가였다. (참고로 김환기는 사망 작가 중 최고가)
- 2009년 〈초원 II〉 12억 원 (최고가)
- 2007년 〈원(園)〉 11억 5천만 원
- 2015년 7월 〈막은 내리고〉(1989) 8억 6천만 원
- 2003년 호당 1,000만 원대 → 2023년 호당 4,000만 원대
미국으로 떠난 후 공개적인 작품 활동을 멈춘 시점부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추가 작품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시장의 판단이 가격을 끌어올렸다.
한국에서 만나는 천경자
- 서울시립미술관 — 1998년 작가 기증 93점 + 추가 컬렉션 100여 점. 그녀의 가장 큰 컬렉션.
- 2024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서울시립미술관) —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꽃과 병사와 포성〉 최초 공개
- 2025년 — 작고 10주기. 다양한 추모 전시 진행 중
- 고향 고흥군 종합문화회관 천경자 전시실 — 2007년 그녀가 기증한 드로잉·판화 66점이 있었으나, 보존 행태에 분노한 작가가 2010년 반환을 요구한 일화도 있다.
마치며 — 슬픈 전설의 페이지
천경자가 평생 남긴 가장 유명한 한마디.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그녀가 그린 것은 결국 자신의 슬픈 전설이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비탄이 아니라 생명으로 변주되었다. 화려한 색채, 꽃, 여인의 깊은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살아남으려는 의지였다.
이번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박수근이 진솔한 침묵을, 이중섭이 애끓는 그리움을 그렸다면, 천경자는 여인으로서의 한(恨)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여성 화가가 거의 보이지 않던 시대에, 그녀는 자신의 몸과 자신의 눈으로 본 세계를 그렸다. 그것이 그녀가 한국 미술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다음에 천경자의 여인 앞에 설 일이 있다면, 그 깊은 눈동자를 잠깐 마주해보시길. 거기 한 화가의 슬픈 전설이 있고, 한국 근대 여성의 생이 있고, 그리고 살아남으려는 모든 사람의 의지가 있다. 그것이 그녀가 그린 한국이다.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 천경자
"그림 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고,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에요."
—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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