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폐허를 조각하는 사람, 이불(Lee Bul)

 

유토피아의 폐허를 조각하는 사람, 이불(Lee Bul)

1989년 어느 날의 한국 갤러리에서 20대 여성 작가가 등산용 밧줄에 몸을 고정한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최승자의 시를 읊는다. 관객들에게 막대사탕이 건네진다. 퍼포먼스는 두 시간 동안 이어지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와 당황한 관객들이 작가를 끌어내린다. 이 무모하고 서늘한 장면을 연출한 사람이 바로 이불이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리게 만든 장본인.


영주에서 베니스까지

이불은 1964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후반 군부독재 말기 한국의 폭압적 공기 속에서, 그는 몸 자체를 재료로 쓰는 퍼포먼스와 그로테스크한 소프트 조각(soft sculpture)을 선보이며 등장했다. 방독면과 군화, 과장된 어깨의 흰 드레스를 한 몸에 걸친 1989년 퍼포먼스는 군부정치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한 화면에 압착시킨 이미지였다.

그의 커리어는 놀라울 정도로 일찍 세계로 뻗어나갔다. 1998년 휴고 보스상 최종 후보,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한국 작가가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서 동시대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징적 순간이었다. 이후 2012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1999년과 2019년 두 차례 초청된 유일한 한국 작가가 되었다. 2019년에는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충돌하는 의미들의 세계

이불의 작업을 하나의 주제로 묶기는 어렵다. 그는 늘 대립하는 의미들이 충돌하는 지점에 서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정신과 몸, 빛과 어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의 작품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동시에 드러낸다.

〈사이보그(Cyborg)〉 연작(1997~). 여성의 몸을 본뜬 반투명 수지 조각. 그러나 팔이 없거나, 다리가 잘려 있거나, 몸통이 비어 있다. 기계와 융합된 이 미래의 여성 신체는 SF적 이상향이면서 동시에 손상된 파편이다. 기술이 약속한 완벽한 신체라는 신화에 그가 던진 가장 강력한 질문 중 하나다.

〈몽그랑레시(Mon grand récit)〉 연작(2005~). 제목은 '나의 거대 서사'라는 뜻의 불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거대서사의 종말'을 선언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는 오히려 유토피아의 폐허를 건축적 모형처럼 빚어낸다. 20세기 모더니즘이 꿈꾼 이상 도시들—브루노 타우트의 알프스 건축, 러시아 구성주의, 콘스탄트의 뉴 바빌론—이 무너진 뒤 남은 잔해가 그의 손에서 아름다운 유적이 된다.

〈취약할 의향(Willing To Be Vulnerable)〉(2015~). 은빛 PET 필름으로 만든 17미터짜리 거대한 풍선 구조물.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잔영을 닮은 이 부풀어 오른 덩어리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거대한 야망 그 자체다. 취약하지만, 그럼에도 부풀어 오르기를 선택한다—제목 자체가 하나의 윤리다.

〈Civitas Solis〉 〈Via Negativa〉. 왜곡된 거울로 된 설치들. 관객이 그 안에 들어서면 무한히 증식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중심도 주변도 없는 공간, 방향 감각을 잃은 몸. 이불의 세계에서 거울은 자기 확인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의 해체 장치다.


뉴욕 메트의 파사드에 오르다

2024년 가을, 이불의 작업은 세계 미술의 가장 상징적인 무대에 올랐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5번가 파사드 커미션에 선정된 것이다. 〈Long Tail Halo〉라는 제목의 네 점의 조각이 메트의 상징적 '니쉬(niche)' 공간을 채웠다. 제네시스(현대차그룹)가 후원한 이 프로젝트는 그가 20년 만에 미국에서 선보인 주요 프로젝트이자, 아시아 작가로서는 손꼽히는 영예였다. 과거에 이 자리에는 휴마 바바, 완기치 무투 같은 세계적 작가들의 작업이 있었다.


리움미술관 《이불: 1998년 이후》 (2025.9.4 ~ 2026.1.4)

한국 관객에게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은 지난 가을부터 올 초까지 이어졌다. **리움미술관이 연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는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작업 1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이례적인 규모의 전시였다. 〈사이보그〉, 〈아나그램〉, 〈노래방〉 같은 초기 대표작부터 〈몽그랑레시〉, 〈취약할 의향〉, 〈Perdu〉 같은 근작까지,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를 가득 채웠다.

전시는 2026년 1월 4일에 막을 내렸지만, 한국 관객이 40년에 걸친 이불의 작업 세계를 가장 종합적으로 만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제목이 '1998년 이후'라는 점이다. 1980~90년대 초기 퍼포먼스는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미 집중 조명되었기에, 이번 리움 전시는 그가 세계 무대로 나아간 이후의 작업 전체를 포괄적으로 조망하는 자리였다.


글을 마치며: 곁눈질로 보는 법

한 인터뷰에서 이불은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같아요." 그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거울에 비친 상(像)이 끝없이 굴절되고, 매끈한 사이보그의 표면은 시선을 미끄러뜨리며, 유토피아의 폐허는 너무 아름다워 슬픔을 숨긴다.

40년 동안 그녀는 완벽해 보이는 것의 균열을 드러내는 일을 집요하게 해왔다. 이상적 여성, 이상적 사회, 이상적 기술, 이상적 미래—이 모든 '이상'들이 실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그 취약함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세계가 이불을 오래 주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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