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새긴 90년의 시간, 조각가 김윤신에 대하여


전기톱을 든 90세 조각가, 김윤신

용인 호암미술관. 전시장 입구를 지나면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거친 나무의 질감과 톱자국이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대리석도, 정교하게 마감된 청동도 아니다. 나무의 밑동과 옹이, 껍질, 그리고 전기톱이 지나간 깊은 홈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들을 만든 사람은 올해 91세의 여성 작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지금도 직접 전기톱을 든다.


"난 한결같은 '동서남북' 작가"

김윤신은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을 유년기에 겪고, 폐허가 된 1950년대 한국에서 미대에 진학한다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195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64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했다. 당시 파리 유학을 마친 여성 조각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귀국 후 홍익대·상명대·성신여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한국여류조각가회 설립을 주도 했지만, 그의 인생은 또 한 번 방향을 튼다. 조카의 "그곳에는 좋은 나무가 많다"는 한 마디에 이끌려, 1984년 중년의 나이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떠난 것이다. 이후 멕시코, 브라질을 오가며 재료 탐구를 이어갔고,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신의 이름을 딴 김윤신미술관을 열었다. 

40여 년간 아르헨티나에 거주했던 작가는 2022년 한국을 방문했다가 좋은 기회가 계속 이어져 최근 한국으로 이주했다. 원산에서 서울로, 파리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그의 삶 자체가 이미 대륙 네 곳을 건너온 거대한 조각이다.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김윤신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이 여덟 글자를 통과해야 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반세기 가까이 그가 붙들어온 사유의 결정체다.

두 개의 것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다시 둘로 나뉜다. 합(合)과 분(分)이 끝없이 반복되며 순환한다—동양철학의 오래된 그림이다. 작업 현장에서 이 철학은 이렇게 작동한다. 나무와 작가는 처음엔 별개의 존재지만, 전기톱이 굉음을 내고 끌이 오가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하나로 녹아든다. 그 합일이 극에 달하는 순간, 나무도 작가도 아닌 '작품'이라는 제3의 존재가 분리되어 나온다. 만남이 곧 분화이고, 분화가 곧 또 다른 합일의 예고편이 된다.


계획 없이 나무와 대화하는 법

그의 작업 방식은 특이하다. 스케치도, 사전 구상도 거의 없다.

"모든 삶이 찰나이듯 나무를 지긋이 살펴보다가 톱을 든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무의 결을 읽고, 옹이의 위치를 살피고, 그 생김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뒤, 비로소 톱을 댄다. 구상 없이 완성되는 조각이라니 위태로워 보이지만, 70년을 나무와 대화해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장 정확한 방식일지 모른다.

초기 작업에는 한국의 전통이 깊게 배어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조각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두 목재를 얽어 접합하는 전통 한옥의 결구(結構) 기법에 근간을 둔다. 또 다른 대표 연작 <기원쌓기(Stacking Wishes)>는 원시 민간신앙에서 발견되는 자연물의 수직 쌓기 개념을 탐구한다. 장승처럼, 솟대처럼, 돌탑처럼—무언가를 간절히 쌓아 올리던 옛 사람들의 몸짓이 그의 나무 기둥에서 되살아난다.


뒤늦게 도착한 세계의 박수

김윤신의 예술적 정점은 놀랍게도 80대 후반에 찾아왔다. 2024년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며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다. 같은 해 국제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의 Lehmann Maupin 갤러리 전속 작가가 되었다. 쿠바 출신으로 80대 후반에야 주목받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카르멘 에레라(1915~2022)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한국 미술사에서 여성 작가, 그것도 조각가가 이 위치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보면, 이 늦은 주목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한 세대 전체에 대한 뒤늦은 인정에 가깝다.


지금, 호암미술관에서

그리고 지금, 그의 70년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호암미술관은 김윤신의 대규모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작가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 이자, 호암미술관이 선보이는 첫 한국 여성 작가 개인전 이다. 이 두 문장만으로도 전시의 무게가 짐작된다.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의 판화부터 최근작까지 약 170여 점이 펼쳐진다. 특히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이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대여되어 왔다. 아르헨티나 이주 직후 조각된 이 작품은 작가 본인도 "가장 마음이 간다"고 꼽은 것이다.


🗓 전시 정보

  • 제목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 장소 호암미술관 (경기 용인)
  • 기간 2026년 3월 17일 ~ 6월 28일
  • 연계 프로그램 4월 24일·5월 15일 대중강연, 6월 13일 국제 학술 심포지엄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사전 예약)

글을 마치며 

나무 앞에 서서 90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전쟁과 분단, 이민과 귀향을 건너 여전히 전기톱을 드는 이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는 일은, 단순히 '좋은 전시를 보는 경험'이 아니다. 무언가에 평생을 몰입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조용히 확인하는 시간에 가깝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한 번쯤 용인행을 계획해볼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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